1980년대 중반 언제부턴가 시드니 셀던이라는 작가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은 아직 국제저작권조약에 가입하기 전이었다. 여러 출판사에서 같은 작품들이 나왔다. 당연히 번역은 좋지 않았다. 독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들여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 독자들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시드니 셀던의 작품은 거의 매번 10만 부 이상 팔리는 인기를 누렸으니 중복 출판은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는 대개 이국적인 정서, 상류층의 음모와 사랑, 전쟁 또는 지독한 갈등, 잔인함, 기발한 해결책, 통쾌한 반전이 포함돼 있었다. 킬링타임용으로도 최고였다.
‘시간의 모래밭’은 한국이 가입한 국제저작권 조약이 발효된 이듬해 출간됐다. 원고 상태에서 받아 영어판과 동시에 책이 나왔다. 당시에는 그것도 화젯거리였다. 자본을 축적한 출판사에 국제저작권조약 가입은 좋은 기회였다. 독점 출판이라면 적어도 30만 부는 판매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 정도 책이 나갔다.
이 소설은 1970년대 말 스페인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배경이다. 바스크의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 ETA(에타·바스크 조국과 자유)와 스페인 정부가 격렬하게 대치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ETA 소속 하이메 미로는 동료들과 함께 카탈루냐 지방의 한 수녀원에 숨어 있었다. 그들을 추적하던 정부군이 습격해 수녀원에 있던 사람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네 명의 수녀와 하이메는 도망친다. 이후 탈주와 추적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수녀들의 과거가 드러나고 감미로운 러브스토리도 가미된다. 거기에 미국 상류층의 음모와 스페인 비밀조직, 바스크 독립을 원하는 민중의 도움을 받은 테러범들의 탈주극이 펼쳐진다. 재미있는 할리우드 스릴러를 보는 듯하다. 이후 영화와 미니시리즈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방영됐다.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왜 요즘은 시드니 셀던의 소설이 보이지 않는 걸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4년에 나왔고, 작가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 통속소설은 그 시대의 평균적인 관심과 감각을 공유한다. 당연히 세월의 변화를 견디기 어렵다.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원인과 결과를 착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살아남은 작품이 고전이 되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같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1929년) 역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작품은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판매량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권장되는 것일 뿐. 고전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읽지 않는 책이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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