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 / 동아일보 혁신과 도전의 100년]
<1> 창간부터 이어지는 모험정신 DNA
《암울한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 4월 1일. 청년정신을 바탕으로 태어난 동아일보는 문화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문화주의를 사시(社是)의 하나로 내걸고 창간했습니다. 민족정신을 고취한 신춘문예와 마라톤대회 등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여성의 외부 활동을 금기시하던 시절 여자정구대회를 창설해 인습에 도전했습니다. 음악·무용·국악콩쿠르와 연극상을 만들어 기초 예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습니다. 수영 사이클 빙상 등 비인기 종목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문화강국이 되기까지 국민과 함께 발걸음을 내디딘 동아일보는 다음 100년에도 청년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100년의 혁신과 도전을 돌이켜 봅니다.》
“용장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서서히 뜨기 시작하여… 공중으로 웅장하게 날아오르니 수만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는 여의도 넓은 마당이 떠나가는 듯하고….”
1922년 12월 10일, ‘기다리던 날’. 동아일보가 다음 날 신문에 1개 면을 할애해 ‘반도의 천공에 최초의 환희, 혹한을 정복한 동포의 열성’이라고 보도한 ‘이날’은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처음으로 난 날이었다.
주인공은 안창남(1901∼1930·건국훈장애국장). 그는 기체에 한반도 모양을 그려 넣은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해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묘기 비행을 3차례 선보였다. 혹한의 날씨에도 전국에서 임시열차 등을 타고 모여든 관중 약 5만 명이 이 광경을 지켜보며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의 비행은 조선의 미래와 희망, 그 자체였다. 일제의 지배를 받으며 침울해 있던 조선 청년들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안창남의 도전은 동아일보의 도전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일본에서 민간항공대회에 입상한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할 수 있도록 1922년 10월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소를 동아일보사 사옥에 마련했다. 비행에 앞서 사설로 “안창남 군의 1회 비행이…조선인도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하는…교훈으로 오인(吾人)의 두뇌에 인각(印刻)할 것이 아닌가”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오늘날의 진취적인 한국인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 역시 이처럼 민족과 함께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에 나섰다. 이는 29세의 창립자, 27세의 편집국장, 26세의 정치부장과 20대 기자들이 오늘날 스타트업처럼 젊은 도전정신으로 창간한 신문이었기에 가능했다.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들었음에도 1920년 창간한 민간신문 3개지 가운데 동아일보만 유일하게 사진기자를 도입한 것도 새로운 실험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는 창간 직후 ‘우리 손으로 찍은 최초의 백두산 사진’으로 이어졌다. 반만년 동안 말과 글로만 전해지던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1921년 8월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한국인의 뇌리에 사진으로 박혔다. 본보 창간부터 합류한 사진반 야마하나 기자(1890∼1935)와 사회부 민태원 기자(1894∼1935)를 비롯한 특파원들이 촬영의 주역이었다.
본보는 8월 21일부터 18회에 걸쳐 등반 리포트를 연재하는 한편 ‘백두산 강연회’를 열고 환등(幻燈)으로 실경 사진을 공개했다. 3·1운동 민족대표들의 재판 과정을 찍은 화보도 본보를 통해 독자에게 전해졌다.
일제강점기 언론 출판 문화면에서도 ‘최초’의 도전과 혁신을 이어갔다. 1929년에는 최초로 서체를 민간 공모했다. 구약성경 개역에도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고, 본보는 4년간의 실험 끝에 1933년 4만여 종의 독자적인 명조체와 고딕체 활자를 개발했다. 이 서체를 본보는 6·25전쟁 전까지 썼는데, 국내 출판물뿐 아니라 북한과 일본, 미국에서도 1958년까지 폭넓게 사용됐다. 지방판 발행도 우리 신문 역사상 동아일보가 처음(1924년)이다. 이 같은 혁신과 도전은 3대 사시(社是) 가운데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케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인 문화주의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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