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조선 기성세대들은 썩어빠진 과거숭배 사상과 천한 허영심으로, 후배를 기르고 이끄는 데는 아주 짜고 선배를 떠받드는 데는 매우 넉넉할 뿐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7일자 1면에 실린 사설의 한 구절입니다. 제목은 ‘조선 부로에게 고함’으로 ‘조선 기성세대에게 알린다’의 뜻입니다. 동아일보는 이 제목의 사설을 5월 4~9일 6회에 걸쳐 실었습니다.
사설은 기성세대가 집안에서 전제군주처럼 자녀들에게 절대 복종만을 강요한다고 비판합니다. 자유와 해방의 진보사상을 배워도 모자랄 판에 봉건시대의 당파적, 계급적 보수사상에 갇혀있다는 것이지요. 자녀들은 성인이 돼도 가장의 지시와 감독을 받을 뿐 자유롭게 의견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기성세대는 윗사람을 잘 모신다고 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섬김을 받지 못할까봐 시늉만 내는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자녀 교육은 의무가 아니라 가장의 권리로 생각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여긴다고 했죠. 이러니 교육을 중도 포기하고 교육을 해도 관직을 얻거나 이전에 당한 모욕을 나중에 복수하려는 목적을 앞세운다는 겁니다. 돈을 쓰는 데는 인색해 자선이나 구호에 나서는 일은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자녀를 강제로 결혼시키는 일도 힘주어 비판했습니다. 조혼이 종마(씨말)나 종우(씨소)를 접붙이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따진 것이죠.
사설은 이런 기성세대는 한학에 빠져 공자 왈 맹자 왈 외우기나 하고 노자와 석가모니는 이유 없이 거부하며 현대과학은 무시한다고 질책했습니다. 주희는 주자로, 송시열은 송자로 떠받드는 유림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고 개탄했죠. 노인끼리, 부자끼리, 친인척끼리만 왕래하는 당파적 행태를 떠올릴 때마다 피가 끓고 열이 뻗친다고 격한 감정까지 드러냈습니다.
1920년에는 아직 유림의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중국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을 1894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지만 중국을 우러르는 모화의식은 여전했죠. 이런 때에 6회 연재한 사설로 유림이 썩어빠졌다고 했으니 파장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5월 8, 9일에는 같은 1면에 ‘가명인(假明人) 두상에 일봉’이라는 칼럼을 2회 실었습니다. 제목은 가명인 즉 명나라 사람 행세하는 유림의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뜻이죠. 이 칼럼은 공자가 70명 제자와 함께 4만 명을 거느려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도발적으로 묻습니다. 조선 유림들은 “성인이 오시는구나. 왜 이렇게 느리게 오시는가”라고 하겠지만 일본은 먼저 공자의 목을 베고 나중에 죄를 묻는다고 비교했습니다. 감히 공자의 목을 벤다고 썼으니 유림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습니다. ‘어떤 요망스러운 놈이 이런 말을 무엄하게 했느냐’며 길길이 뛰었던 것이죠.
당시 동아일보는 20대 청년들이 주축이었습니다. 이들이 볼 때 유림은 나라를 빼앗긴 책임이 있는 기성세대였죠. 그런데도 옛것을 놓지 못하고 권위만 내세우니까 세대교체를 해야 하겠다고 정면 공격했던 것입니다. 유교의 정신은 놓아두고 서양의 기술만 배우면 된다는 ‘동도서기론’은 소용없다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유림이 불매운동까지 한다며 거세게 항의하자 사설 필자 김명식과 ‘한별’ 필명으로 칼럼을 기고한 국어학자 권덕규는 필화에 휘말렸습니다. 동아일보의 첫 필화이기도 했죠. 유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사장 박영효가 사과문을 실으라고 했죠. 이 때문에 열린 사원회의에서 폐병이 깊어진 추송 장덕준은 “왜 우리 청년들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느냐”며 치를 떨다 피를 토해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동아일보는 한쪽에서는 총독부에 맞서고 다른 쪽에서는 과거에 파묻힌 기성세대와 싸워야 했습니다. 필화는 편집국장 이상협이 필명 ‘한양과객’으로 두 글을 나무라는 독자기고를 써서 5월 13, 14일 실은데 이어 주간 장덕수가 5월 17~20일 사설 ‘가명인 두상에 일봉과 유교의 진수’를 4회 실어 칼럼의 일부 표현은 무례했다고 하면서 정리됐습니다. 하지만 박영효 사장은 6월 1일 결국 사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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