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악회는 도처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경성의 유식계급, 그 중에서도 청년사회에서는 많은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건이었다.’ 소설가 겸 언론인이었던 우보 민태원이 1921년 ‘폐허’에 발표한 단편소설 ‘음악회’의 한 대목입니다. 일제의 억압과 질곡으로 피폐해진 삶에 음악회가 한줄기 빛 같은 역할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의 소재는 1920년 5월 4일 경성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지금의 YMCA 회관)에서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린 ‘류겸자(야나기 가네코) 독창회’였습니다. 3대 사시(社是)의 하나로 ‘문화주의’를 천명한 동아일보의 첫 문화사업이었던 이 행사는 서구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던 뽀이, 모던 걸’들을 클래식의 세계로 이끈 국내 최초의 서양음악회이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음악회에 앞서 류겸자 여사를 ‘세계적 성악가 중 저명한 1인이요, 일본 여류 음악계의 최고 권위’라고 평가했습니다.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이 앨토 성악가는 당시 28세에 불과했지만 이 같은 소개가 결코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행사 하루 전 남대문역에 도착한 그를 환영하기 위해 조선 여성계를 대표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린 나혜석 같은 신여성들까지 마중 나왔으니까요.
5월 6일자에 실린 음악회 상보(詳報)에 따르면 독창회는 당초 오후 7시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종로 넓은 길을 덮고, 회관 정문이 터지도록 모여들어’ 1시간 늦게 시작됐습니다. 청중들은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야 했습니다. 1등석 2원, 2등석 1원 50전, 3등석 1원이었는데, 당시 동아일보 월 구독료가 60전이었으니 지금으로 하면 단순 계산으로 3등석도 3만3000원쯤 하는 셈이지요. 그런데도 대강당 1300여 석을 꽉 채운 것은 진귀한 클래식 음악회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에 수입 전액을 조선의 문화사업에 쓴다는 갸륵한 취지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류겸자 여사는 피아니스트 사카키바라 씨의 반주에 맞춰 약 2시간 동안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베버의 ‘마탄의 사수’ 등 10여 곡의 오페라와 가곡을 선사했습니다. 물론 피아노 독주와 10분의 휴식시간이 있긴 했지만 1시간 반 정도를 혼자 책임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92세 되던 198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청중은 주로 젊은이들이었는데, 자리가 없으면 창가에 매달려 들을 정도로 몰려 기쁘고 보람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5월 4일 행사 이후 17일까지 총 6번의 독창회를 마친 그는 이듬해 다시 조선을 방문해 6월 4일 경성 경운동 천도교중앙회당을 시작으로 개성, 평양, 진남포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했습니다.남편 류종열(야나기 무네요시)이 “조선민족의 생명이 흐르는 조선 미술품을 조선 땅에 지키자”며 추진한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겁니다. 경성 독창회를 주최한 동아일보는 6일자에 이를 보도하면서 ‘현오한 비곡(헤아릴 수 없이 깊은 곡조)에 감격한 청중’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남편은 강연으로, 아내는 독창회로 기금 모금에 나선 끝에 조선민족미술관은 마침내 1924년 4월 경복궁 내 집경당에 개관합니다.
류겸자 여사는 이후에도 조선에서 관동대진재로 무너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재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독창회 등 수십 차례의 공연을 하며 근대 서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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