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뚝심 있는 여성 작가의 가부장제를 향한 ‘복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8일 03시 00분


[그때 그 베스트셀러]1990년 종합베스트셀러 2위(교보문고 기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지음/329쪽·1만3000원·세계사

1989년, 여성신문에 연재됐던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출간됐다. 표제작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와 ‘서울 사람들’, 두 편의 경장편이 수록돼 있었고 독자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알고 있는 것만을 쓴다” 혹은 “경험한 것만을 쓴다”고 언제고 강조해온 박완서는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혹독하게 가부장제에 싸움을 걸었다. 이 싸움을 독자는 열렬하게 응원했다.

좀더 부연하자면 아버지가 내면화한 모든 선호들이 곧 규율이자 윤리가 되는 한 가정의 모습과 그것이 어떻게 부도덕을 포장하는 알리바이로 작동하는지, 어찌해서 “아버지 자격이 없음”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와 맞서 싸우는 여성에게는 어떤 폭력이고 어떤 착취인지를 복수하듯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이 ‘복수’를 격렬하게 응원한 대중의 한 사람이던 그 시절의 나는 박완서 특유의 설득력 있는 디테일도 그렇거니와 당대의 과제를 이토록 정면으로 다루는 뚝심 있는 여성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됐다. 그때에도 너무 늦게 이런 소설이 우리에게 도착했다고 느꼈는데 지금도 이 소설의 전투력이 유효한 것을 생각하면 가부장제의 반성은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이 분명하다.

박완서의 ‘경험한 것만을 쓴다’는 정신은 여성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하겠다는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작가의 말’에 박완서는 자신의 소설 쓰기를 이렇게 적어두었다.

“뜻하지 않게 닥쳐온 무서운 고통과 절망 속에서 겨우 발견한 출구는 쓰는 일이었으니까요. 아니지요. 출구라기엔 아직 이릅니다. 출구를 찾아내기 위한 정신의 물리치료법이랄까, 워밍업이라고 하는 쪽이 조금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출구라기보다는 워밍업. 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먼 출구인 줄 알면서도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것. 그 먼 데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워밍업. 그러기 위해 우선 꿈에서 깨야 하고,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반복될지라도 지칠 수는 없다는 것.

결혼과 출산과 육아의 시간이 가져다 준 경력단절을 극복하고 뒤늦게 등단한 박완서가 2011년 담낭암으로 투병하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엄청난 작품들을 쏟아내며 40년 동안 치열하게 활동해왔다는 것 자체가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독자들에게는 가장 열렬한 선물이었다.

치열하게 쓰는 것으로 문제를 뚫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삶. 종내 건강하고 해맑은 미소를 얻는 사람. 박완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숱한 작품들을 아낌없이 사서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독자는 박완서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기쁨이 클 것이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문학 독자들이 박완서를 만난다 해도 이 기쁨은 유효할 것이다. 모든 베스트셀러 작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아니다. 박완서라서 가능한 것이다.

김소연 시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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