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기획/동아일보 100년 문화주의 100년]
<1> 문화주의 선언과 지면 위에 구획된 문화
《1920년 4월 1일 창간 이후 동아일보의 100년은 억눌려 있던 반만년 문화 민족이 다시금 문화의 꽃을 피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대표적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가 문학을 주요 테마로 ‘문화주의 100년’의 족적과 의미를 짚어본다.》
‘창천(蒼天)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동아일보의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아일보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첫째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둘째 민주주의 지지, 셋째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3대 주지(主旨)로 창간의 의의를 선포했다. 세 가지 목표 가운데 유별난 것이 바로 문화주의다.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富)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오묘(深遠奧妙)라.’
‘문화주의’는 100년 전 창간 당시를 돌아보면 그 자체가 낯설다. 문화주의라는 말은 동아일보 이전의 국내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용어다. 문화라는 말조차도 대중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았던 시대가 아닌가?
‘주의(主義)’라는 말이 붙어 있는 ‘문화주의’라는 합성어에는 그 지시 영역과 의미의 범주화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미묘한 힘이 담겨 있다. 문화주의는 지식과 교양이라는 문화의 관념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적 의지를 포함한다. 동시에 실질적이면서 구체적인 민족의 삶의 모든 활동 영역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괄하고자 하는 의욕을 드러낸다. 이 엄청난 구상이야말로 동아일보의 문화주의 제창을 다시 주목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동아일보의 문화주의에는 민족을 그 주체로 내세울 수 없었던 식민지 현실의 모순이 내재돼 있다. 여기서 문화주의는 ‘문화통치’를 표방했던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한 표면적 수용과 정신적 저항이라는 양가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화주의라는 말이 겉으로 드러내는 보편적 가치 지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민족의 문화’ 또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담겨 있다.
문화는 그 형성의 주체가 되는 민족의 삶과 현실을 떠나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아일보는 창간과 함께 일제의 강압적 언론 규제를 견뎌내야 했고 불가항력의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세운 문화주의의 주지만큼은 끝까지 지켜냈다. 대중매체로서 다채로운 행사를 직접 주관했다. 그리고 문화의 넓은 영역 안에서 언론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상업주의적 요구의 이질적 충돌까지도 신문지면 배분의 균형과 형평성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삶의 방식과 내용을 내적으로 형성하는 정신적 실체의 규명에 언제나 앞장서 왔다. 민족 전체의 삶에서 드러나는 중요 관심사와 그 실질적 가치를 사회 각 방면의 제도와 활동을 통해 확인 취재하고 이를 널리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의 영역과 위계가 구획됐고 정치, 국제관계, 경제, 지역사회 등에서 일어나는 숱한 사건들이 신문지면 위에 분할 배치됐다. 고급 예술은 물론 개인적인 지적 탐구활동까지도 포함됐다. 사소한 일상도 문화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지면에 가시적으로 펼쳐놓기 시작했다. 더구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구 반대쪽의 외국 사정과 같은 지면에 소개하면서 그 삶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했다. 이 같은 삶의 동시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동아일보가 주창하고 있는 문화주의의 가치를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 직후 단군(檀君) 영정을 공모하고 이듬해 백두산 천지(天池) 사진을 실었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근원을 밝히고 동아(東亞) 문명의 출발점을 알리기 위한 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칭송된 타고르의 입을 통해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빛나던 등촉 하나인 조선/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일본 지식인으로 미술비평의 권위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일본의 칼날이 아니라 한국은 그 예술의 미로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거니와, 지배자인 일본인의 눈을 통해 한국 전통예술의 미(美)적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도록 한 것도 동아일보다. 식민지 지배 상황 속에서 이보다 더 가슴 벅찬 민족 문화의 표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동아일보는 사회계몽 사업으로 문자보급 운동을 선도했다.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언문 표기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조선어 교육의 축소 제한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스스로 한글 강습을 주도하면서 민족의 교육과 지식 정보의 대중적 보급을 수행했다. 이 특이한 민족어 운동은 일본어를 ‘국어’라고 강요했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아일보가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지배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의 공식화에 맞선 피식민지 민족어의 생존 투쟁이라고 할 만하다. 동아일보가 지향하는 문화주의의 탈식민적 성격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동아일보는 문화주의의 주지 아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스포츠를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마라톤, 여성 정구 등 스포츠 대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면서 체육과 보건이 민족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주지시켰다. 또 민간 중심의 체육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스포츠를 통해 강조했다.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 상공을 비행한 안창남이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고 조종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안창남 고국 비행’을 위해 모금을 주도한 것도 동아일보다. 안창남이 민족의 성금으로 마련한 비행기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서울 상공을 왕복 비행하던 모습은 동아일보 지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1위로 결승선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신문의 첫머리에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올렸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폐간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동아일보는 민족의 열정과 울분을 그렇게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는 사회생활에서 소외됐던 여성을 신문의 지면 위로 끌어내고 그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안살림’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었던 육아, 요리, 복식 등의 가정생활을 기삿거리로 만들어 사회문화적 관심사로 키워냈다. 어린이를 위한 지면을 별도로 만들고 청소년의 투고를 장려했다. 낡은 것으로 버려진 채 민간에만 전해졌던 전래의 연희를 전통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문 지면에 올렸다. 민족문화의 저력이 민속과 전통 연희의 오랜 역사 속에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유(閑遊)의 여기(餘技)에 불과했던 바둑을 지적 스포츠로 승격시켜 지면에 바둑판을 깔아놓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신문 중심의 보도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문화적 융합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업 확장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신문사 안에 별도 조직으로 출판국을 설치하고 ‘신동아’ ‘신가정’ 등의 잡지를 발행해 신문사의 ‘자매지 시대’를 열었다. 광복 이후 방송이라는 새로운 영역에도 진출했다. 신문과 출판의 결합에 이어 방송과의 연결을 통해 매체와 제도의 변혁과 융합을 선도했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삶의 방식을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신문 지면에 배치하고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그 역할을 상호 보완했다.
동아일보는 지난 100년 동안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기록을 축적함으로써 그 자체로서 생활 문화의 거대한 ‘아카이브’가 되었다. 신문 기사가 가지는 기록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보존, 활용하기 위해 일찍부터 이를 독자적으로 분류, 정리했다.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기사 내용을 손쉽게 컴퓨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신문 지면의 ‘축쇄판’을 자체 제작해 널리 보급했다. 동아일보는 한국 문화의 근대적 변화와 모더니티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자료들을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함으로써 문화적 민주주의의 신념을 자연스럽게 실천해왔다.
동아일보는 다양한 매체가 융합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있다.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을 놓고 독자의 관심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종합 문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새롭게 구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주의’라는 주지를 앞에 두고 그 영역의 확장에서 드러나는 문화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더욱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동아일보 문화주의 200년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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