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리히터-마이클 아미티지 등 시대정신 구현하는 구상 작가 각광
일그러진 형상-신체의 일부만 표현, 기존 구상-비구상 이분법과는 달라
미술사적, 미학적 맥락 부족하면 같은 구상 회화라도 생명력 짧을것
미디어 속 이미지나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표현으로 형상을 그려 주목받는 독일 출신 작가 다니엘 리히터의 ‘Tarifa’(2001년). 지브롤터 해협을 보트를 타고 건너는 북아프리카 난민을 표현한 작품. 발표 당시에는 관객들이 주황색 물체를 카펫으로 봤지만, 국제 난민 문제가 떠오른 뒤에는 몰래 국경을 넘기 위해 난민들이 탄 위태로운 보트를 떠올린다. ⓒDaniel Richter/DACS, London 2019 Courtesy of Galerie Thaddaeus Ropac
젊은 작가의 실험적 작품을 볼 수 있는 홍익대 일대, 문래동, 을지로의 대안 공간이나 작은 전시장엔 여전히 영상·설치 작품이 주류다.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선 구상 작품은 구닥다리고 ‘동시대 미술’로 인정될 수 없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제 미술의 흐름을 보면, 결국 작가는 캔버스 위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맛깔 나는 기교를 앞세운 회화가 이미 미술계의 전면에 서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의 공공미술관인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올해 첫 대규모 기획전으로 ‘Radical Figures: Painting in the New Millenium(급진적 형상: 뉴밀레니엄 시대의 회화들)’을 열었다. 2월 6일 개막한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휴관했다.
전시는 2000년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구상 작가 10명을 모았다. 미술관이 ‘시대정신을 표현했다’고 평가하며 소개한 작가들은 마이클 아미티지, 세실리 브라운, 니콜 아이젠만, 데이나 슈츠 등이 있다. 이 중 독일 출신 작가 다니엘 리히터의 작품이 가장 눈길을 끈다.
2001년 작품 ‘Tarifa’는 스페인 남부 항만도시 타리파로 향하는 보트를 탄 북아프리카 난민을 표현한다. 칠흑 같은 바닷물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인물들은 열 감지 카메라로 비춘 듯 화려한 색채로 표현됐다. 난민 문제를 비롯해 공포와 불안이 감도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포착해 호평받은 작품이다.
케냐 출신 작가 마이클 아미티지의 ‘#mydressmychoice’ (2015년). ⓒ Michael Armitage, Courtesy of White Cube, Photo: George Darrell흥미로운 건 최근 주목받는 ‘구상 회화(figurative painting)’의 뉘앙스가 과거 국내 미술계에서 이야기했던 비구상(추상)·구상의 이분법과 다르다는 점이다. 화이트채플 큐레이터 리디아 이는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일그러진 형상과 신체의 일부만을 표현해 고정된 개념을 흔들고 확장시킨다”며 “이들은 회화가 어떻게 개인의 불안과 사회 문제를 담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즉 단순한 기교를 넘어 개인과 사회 문제를 담는 수단으로 구상 회화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국 작가 장파의 ‘My Little Riot Girl’(2015년). ‘여성적 그로테스크’를 회화로 풀어냈다. 두산아트센터 제공이런 구상 회화 열풍의 시작은 198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표현주의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젤름 키퍼, 게오르크 바젤리츠와 미국의 장미셸 바스키아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당시만 해도 주식 시장의 호황과 맞물린 투자 대상, 개념미술에 지친 컬렉터를 겨냥한 상품이라는 회의적 시각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해체되는 시대상을 담아 이제는 미술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있다.
시장에서도 이에 발맞춘 움직임이 감지된다. 외국계 화랑인 리만머핀 서울은 영국 작가 빌리 차일디시의 최근작을 23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차일디시는 1999년 회화를 고집하는 ‘스터키즘’ 운동을 시작했다가 2001년 결별하고 개인적인 회화를 그리고 있다.
페로탱 서울 등 다른 화랑에서도 구상 회화가 등장하는 분위기다. 다만 전문가들은 “같은 구상 회화라도 미술사적, 미학적 맥락을 갖고 있지 않다면 순간 유행에 그칠 우려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