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공소가 많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엔 ‘예술촌’도 있지만, 미술계에선 아는 사람만 찾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평일인 17일 이곳 한 건물 지하에 조용히 꾸준한 발길이 이어졌다. 가수 나얼이 개인전 ‘염세주의적 낙관론자’를 열고 있는 대안공간 스페이스 엑스엑스(space xx)다.
전시장에서 나얼의 콜라주와 드로잉, 설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30일까지 열리는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e메일로 신청 받아 매일 선착순 40여 명만 관람할 수 있다. 찾는 사람 대부분은 가수 나얼의 팬으로 보였다.
이처럼 연예인의 미술 전시가 이제는 익숙한 현상이 되고 있다. 나얼도 이번이 벌써 10번째 개인전이다. 가수 솔비나 배우 하정우 등도 그림 그리는 모습을 공개해 화제몰이를 했다. 해외에서도 배우 조니 뎁, 가수 밥 딜런, 데이빗 보위는 물론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자신의 그림을 깜짝 공개한 바 있다.
유명 인사들은 왜 그림에 빠질까? 작품을 보면 직업 특성상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속내를 풀어내는 경향이 보인다. 악성 루머에 시달린 솔비는 심리 치료로 미술을 시작했다. 일기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에 담으며 조금씩 세상에 다시 발을 내딛었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배우 임하룡의 그림엔 눈이 가득하다. “시선 받기를 원하지만 또 그 시선이 때로 부담스러운 마음을 형상화했다”는 그의 설명처럼 재기발랄한 성격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이다.
2007년부터 그림을 그린 배우 하정우는 과거 인터뷰에서 연기하며 느끼는 절실한 감정을 집에 가지고 와 그림에 담는다고 했다.
나얼은 전시장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등 종교적 색채를 과감히 드러낸다. ‘염세주의적 낙관론자’라는 제목도 기독교도로서 자신을 비유했다. 이문정 리포에틱 대표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게 살지만, 세상의 불행에 슬퍼하는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이라고 평했다.
이들의 활동은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친근하게 느끼는 ‘대중 미술의 저변 확대’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비춰진다. 특히 예술을 전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표현 수단으로서 그림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최근엔 일반인들도 퇴근 후 드로잉이나 풍경화를 그려보는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한다. 또 평소 전시를 보지 않았던 사람도 한 번쯤 미술을 감상하는 첫 경험의 관문이 되어 주기도 한다
최두수 space xx 대표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반응이 많아 깜짝 놀랐다. space xx는 실험적 작품을 선보여 알음알음 찾는 곳이었는데 온·오프라인에서 관심의 폭이 훨씬 확장됐다”고 말했다. 나얼 개인전의 경우 관람 신청은 매일 100~150건 정도가 들어온다고 한다.
다만 연예인의 작품이 그의 유명세를 넘어 작품 자체로 인정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술사의 맥락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평생 작품을 쌓아가는 전업 작가를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작가는 “바스키아가 포함된 컬렉션을 가진 가수 Jay-Z 등 해외 유명인사처럼 국내 유명인들이 안목을 키워 작품을 후원하는 컬렉터로도 역할을 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