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니 조선 사람이 통치해야겠소. 모든 걸 빼앗긴 우리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소. 우리는 행복한 생활을 위해 독립을 요구하오.”
7, 8개월 동안이나 철창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아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지만 일제 치하 법정에서 이토록 당당하게 독립을 부르짖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령 1호로 국내에 설치돼 임정의 지령을 전파하고, 구국자금을 모으는 일을 한 비밀 행정조직, ‘연통제’ 사건 관련자들이었습니다.
위에 든 예는 함경북도 연통제 조직 설립을 주도한 김인서(1894~1964)의 말이지만,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1920년 8월 4일부터 나흘간 계속된 공판에 나온 47명의 ‘피고’ 모두 한 목소리였습니다. 박상목은 이시바시(石橋) 판사가 독립을 원하느냐고 묻자 “독립은 조선사람 전체가 희망하는데 나라고 다르겠느냐”고 외쳤고, 정두현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의붓아버지(일본)에게 봉사하지만 어찌 친아버지(조선)를 간절히 생각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8월 22일자부터 31일자까지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연통제의 공판’이라는 제하의 7회 연재기사로 이 공판 내용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사실 동아일보가 판결문이나 공판기(公判記)를 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6일자부터 3·1만세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예심재판을 다룬 ‘47인 예심결정서’를 8회 연재해 3·1운동의 주체와 경과 등 진상을 알렸고, 강우규 의사 공판기, 대한청년외교단·대한애국부인단 공판 방청 속기록 연속기사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에 항거한 쾌거를 지면을 아끼지 않고 보도한 것은 총독부의 검열을 피해 조선 민중에게 독립에의 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공개된 판결문이나 공판 내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다는 데 그들도 막기 어려웠을 겁니다.
결사단지대(決死斷指隊)를 조직해 독립운동의 의지를 벼렸던 이규철이 연통제 공판에서 보여준 결기는 비장합니다. 그는 앞으로 나와 손을 펴 보이라는 판사의 말에 주먹을 단단히 쥐며 “볼 필요 없다. 정 보고 싶으면 (네가) 내려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손가락을 자른 건 명예를 얻으려는 수단 아니냐는 속물적 질문에는 “끊은 손가락을 항상 보면서 결의를 다졌다”고 대응하고는 “강도의 무리에게 잡혀온 나에겐 죄가 없다”고 일갈합니다.
경찰이 고문을 자행했다는 사실도 폭로됐습니다. 이운혁은 나남경찰서에서 했던 진술을 번복하며 “다른 사람이 거의 죽게 된 것을 봤는데 구로다(黑田) 경부가 나도 몹시 때려 할 수 없었다”고 했고, 김동식도 “혹독한 심문을 못 이겨 정신이 휘황해서 그랬다”고 진술합니다.
신도(新藤) 검사의 구형 후 판사는 피고들에게 ‘이익이 되는 말’이 있거든 진술하라고 합니다. 최후진술의 기회를 준 거죠. 그러자 윤태선은 “일본이 강탈한 조선을 도로 찾자고 하는 게 무슨 죄냐”고 따졌고, 최종일은 “삼천리강토가 다 유치장이요, 감옥인데 나간다 한들 무슨 자유와 행복이 있겠느냐”고 꾸짖습니다. 이어 “2000만 조선 사람을 다 잡아다 죄를 줘라”, “중죄를 준다고 독립운동을 안 할 줄 아느냐, 누르면 누를수록 간절히 독립을 요구한다” 등의 성토가 계속되자 판사는 서둘러 폐정을 선언하고 쫓기듯 뛰어 들어가고 맙니다.
동아일보는 연통제 공판기 7회를 연재하면서 21개의 작은 제목을 붙였습니다. ‘연통제는 조헌(朝憲·조정의 법규) 문란’이라는 검사 발언 외에 대부분은 ‘일본의 정책은 착오’, ‘독립은 자연히 될 것’, ‘독립을 간절히 원하나 자격 없음을 한탄’ 등 피고들의 주장으로 채웠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