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서 자진(自盡)하겠어요. 인간 세상에서 저런 광경을 본 이상 더는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네요.”
가까스로 수용소를 탈출한 임신 9개월의 아내가 땅에 주저앉아 한 말이다. 이 같은 극단적 좌절의 배경은 1937년 ‘난징(南京) 대학살’이다. 일본군이 중국 난징을 침략한 뒤 반년간은 ‘살인, 노략질, 강간, 방화, 기근 한파, 폐허’뿐. 중국 해군의 관리인 소설의 주인공은 아내와 아들을 비참하게 잃고 자신도 집단 살육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일본군 장교의 하인으로 위장한 채 몰래 아군을 위한 첩보원으로 일하면서 ‘바위와 금속만으로 된, 시간이 없는 세상’을 버텨 나간다.
‘학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수정주의 역사관이 일본에서 확산되는 요즘, 중일전쟁 종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55년 일본인 소설가의 작품이어서 더욱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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