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63세 러시아 항일투사 최재형’ 일제는 재판도 없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5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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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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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경원의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아홉 살 때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마을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했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학대를 못 이겨 2년 뒤 무작정 가출하지만 탈진해 쓰러지고 맙니다. 다행히 큰 상선의 선원들에게 발견된 소년은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6년간 배를 타며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러시아어를 배우고, 다양한 지식을 쌓고, 세상도 두루 경험했죠. 상사(商社)에 들어가 얼마간 돈을 모은 그는 이후 군납사업으로 큰 부자가 됩니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자치단체장 격인 노야(老爺), 도노야(都老爺)에 선출되고, 여러 차례 러시아 훈장도 받았습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 조성된 최재형의 동상.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 조성된 최재형의 동상.
하지만 ‘뿌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이주 한인들이 대거 동원된 공사현장의 통역을 맡아 이들의 고충을 대변했고,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장학생을 선발해 한인 자녀 교육에 앞장섰습니다. 그에겐 선장 부부가 지어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이 있었지만 한인들은 그를 ‘최 페치카’라 불렀답니다. 페치카는 표트르의 애칭이기도 하지만 그가 따뜻한 벽난로 같은 존재라는 뜻을 담은 겁니다.

최 페치카는 한인사회를 돌보는 데 머물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합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 뒤 러시아로 모여든 군인들을 모아 무력전을 벌이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돕고, 동의회(同義會) 권업회(勸業會) 같은 항일단체를 조직해 활동했습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됐던 그에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이쯤이면 짐작되시나요? 맞습니다.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이자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선생 얘깁니다. 이처럼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최재형은 63세 때인 1920년 일제에 의해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 해 3월 러시아 적군(赤軍·볼셰비키 혁명군)이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자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4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등에 진주합니다. 이때 일본군은 러시아 적군에 우호적이었던 한인의 거주지까지 쳐들어가 무차별 살상하는 ‘4월 참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눈엣가시 같던 최재형 등 무력 항일투쟁의 지도자들을 재판도 하지 않고 총살하지요.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약 한 달 뒤인 5월 8일자로 이 비극을 국내에 전한 데 이어 다음날 해설기사를 통해 최재형의 삶을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성은 이 사건을 발표하면서 ‘과격 문서를 배포’, ‘일본군에 고용된 조선 사람을 살해’, ‘치안을 어지럽히고…’와 같은 표현으로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을 폭도로 매도하고 최재형 등을 ‘그들의 두목’이라 칭해 4월 참변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5월 9일자 ‘최재형은 어떤 사람인가?’ 기사에서 그를 ‘인격이 훌륭해 만인의 신망을 받았다’, ‘한 푼이라도 생기면 공익에 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 등으로 묘사해 일제의 발표가 거짓임을 드러냈습니다.

최재형과 함께 흉탄을 맞은 분들로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선생도 있습니다. 연해주 한인민단 단장을 지낸 김이직, 엄주필은 각각 1977년과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황경섭은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분들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황경섭에 대해선 정보가 부족했는지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돼있습니다. 1920년 6월 22일자 신한민보는 황경섭을 ‘□9세에 도강하여 상업을 경영, 한인계의 대 실업가가 됐다.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러시아인을 교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설명했고, 최재형의 딸 최올가의 회고록을 보면 황경섭은 최재형과 친구이자 사돈지간이었으니 이제라도 황경섭 역시 최재형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는 주석을 달고 싶습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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