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간 제주행. 당일치기 일정이기에 한 끼는 정말 ‘제라하게’(‘최고로’ ‘제대로’라는 뜻의 제주 방언) 먹어야 했다. 부모님께서 웃으며 ‘찜해’ 둔 곳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향하는 곳은 부동산이 아닌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정이 많은 지인,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제주의 식당이나 숨은 맛집을 꿰뚫고 있을 것이라 믿어 그분이 가자는 곳으로 갔다.
차는 해안선을 미끄러지며 표선항에 도착했다. 2002년부터 조용히 한자리를 지켜온 ‘다미진횟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다른 곳들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 집만은 손님의 온기로 활기찼다. 제주에 뿌리를 두고 도민들의 ‘찐맛집’으로 인정받아 위기의 풍랑에서도 순항하는 횟집이었다. 메뉴판에서 다미진 B코스를 주문했다. 창밖으로는 표선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다. 잔잔한 파도, 시원한 오뉴월의 바닷바람. 제주 바다를 즐기기에 지금처럼 좋은 시간이 없다. 친절하고 인심 좋은 사장님이 제주 바다를 코스별로 맛있게 차려 주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로 잔잔한 파도로 시작하여 앞바다, 깊은 바다로의 취함, 다시 뭍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펼쳐졌다.
한라산 소주 한 병을 땄다. 맑게 씻은 묵은지에 쌈 다시마, 꽁보리밥에 갈치속젓이 먼저 나왔다. 제주에서는 쌀이 귀하고 보리가 많아 보리밥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향토 음식에 어려 있다. 다음으로 딱새우회와 해파리채가 나온다. 혀로 호로록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면 새우 살이 녹으면서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은갈치회는 제주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갈치는 성격이 급한 어종이라 부패가 빨리 진행된다. 잡자마자 회를 뜨니 반짝반짝 빛나는 등이 눈부시다. 갈치 살 특유의 담담한 고소함, 녹진한 식감에 잠시 혀마저 경건해졌다. 다음은 제주 홍해삼, 전복, 소라, 멍게, 홍합으로 구성된 모둠 해산물. 바다 향이 막힌 코를 뚫고 머리와 가슴으로 숨비소리를 전했다. 요기가 되도록 나온 초밥은 정갈했다. 절정은 광어와 참돔이 얹어진 회. 참 익숙한 어종인데 입안을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살점이다. 미네랄워터에 절여낸 듯 감칠맛의 어즙이 입안에 흥건했다.
전반부가 원재료의 신선함이 맛을 낸다면 후반부는 요리 솜씨가 빛을 발한다. 숙성 흑돼지를 쓴 부드러운 돈가스가 천연 재료의 소스와 어우러져 혀에 찰싹 붙었다. 모둠 튀김과 고등어구이도 별미고 마지막으로는 생선 맑은탕에 게우밥이 나온다. 전복 내장인 게우로 고소하게 밥을 볶아 통통한 전복 살점을 아낌없이 넣었다. 지글지글 달궈진 철판에 오름처럼 소복이 나오는데 윗부분을 떠먹고 바닥은 볶음밥으로 눌려 먹는 것이 별미다. 운이 좋으면 지난해 담근 김장김치를 맛볼 수 있다. 한라산의 정기와 해풍을 맞아 겨우내 숙성된 김장김치를 찢어 먹고 있으려니 세상 모든 바이러스가 피해갈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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