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선생은 까치 한 마리 동아일보에 던져놓고 홀연히 가셨다. 그야말로 새처럼 날아가셨다…(충남 연기군 선산에 세운) 비문에 마지막 그림 하늘을 새기기로 했다. 그 탑비는 내 섭섭함의 징표다.”(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조각가)
장욱진 화백(1917∼1990)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부인 이순경 여사(101)와 생전 장 화백이 ‘간이 맞는 딸’이라며 각별히 여겼던 장경수 경운박물관장(75)은 유품을 정리하다 그림 한 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타계 사흘 전인 1990년 12월 24일, 동아일보 의뢰를 받아 그린 신년 축화(祝畵)였다.
까치 한 마리가 창공을 박차고 날고 있고 하단의 산봉우리는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왜 산을 거꾸로 그렸느냐”는 이 여사의 질문에 장 화백은 “하늘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잖아”라고 답했다. 기억을 더듬던 이 여사는 딸에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걸 예감하셨나 보다”고 했다.
15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만난 장경수 관장은 “동아일보의 1991년 신년 축화는 준비할 겨를도 없이 떠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애틋한 그림”이라고 말했다. 화단에서는 보통 유화인 ‘밤의 노인’(1990년)을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지만 장 화백이 직접 ‘1991년’이라고 서명한 것은 이 신년 축화가 유일하다. 그가 묻힌 충남 연기군 묘역의 탑비(塔碑)에도 이 그림이 새겨져 있다.
장 화백은 1989년 동아일보 창간 69주년 축화도 맡았다. 산봉우리 위로 떠오른 태양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새를 그린 그는 “새의 날갯짓이 바로 생명력이다. 더욱 활기찬 동아일보의 비상(飛上)을 기대한다”고 적었다. 장 관장은 “생전 아버지가 어떤 요청이든 오면 거절하지 않았던 신문사가 동아일보”라고 했다.
그 20년 전인 1969년에는 ‘서사여화(書舍餘話)’ 코너에 칼럼을 연재했다. 평소 말수도 적고 좀처럼 속내를 표현하지 않는 그였지만 친하게 지냈던 문화부 기자의 제안에 필자로 합류했다. 장 관장은 “술자리에서만큼은 선문답하듯 말을 잘하니, 기자분이 아버지가 글을 잘 쓸 거라고 짐작했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아버지가 외마디 소리는 잘하지만 글 쓰는 일은 익숙지 않아 굉장한 부담을 가졌어요. 글 하나를 완성하면 진땀을 뺐다는 의미로 ‘내가 대작(大作)을 하나 했다’고 하셨죠.”
수개월 연재하다 끝내 부담을 못 이겨 손을 뗀다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글이 강렬하고 재미있다는 독자들의 반응 덕분에 연재는 이어졌다. 장 화백은 술을 마시다 창가에서 떨어진 이야기, 누구나 갖고 있는 어려움과 고민을 표현하는 문제부터 ‘심플’을 추구하는 자신의 가치관까지 솔직히 글에 털어놓았다. 이때 쓴 글은 1976년 그림에세이 ‘강가의 아틀리에’로 출간됐다.
“아버지는 ‘화가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서사여화에 쓴 글은 본인의 정신세계나 삶의 태도에 관한 것들이죠. 그럼에도 그림 속에 담긴 깊은 매력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언론의 보도나 기고가 그런 아버지의 작품세계와 대중이 만나는 가교나 마찬가지였죠.”
이제 장 화백은 말이 없으니 그림으로 그의 흔적을 느껴볼 수밖에 없다. “작품 한 점 한 점이 아버지의 분신처럼 느껴진다”는 장 관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문 밖으로 나서려다 돌아와 부친의 그림을 손으로 한 번 더 쓰다듬은 후에야 미술관을 떠났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