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진짜 근육 파워로 (연주를) 했어요. 내가 차범근 씨보다 근육이 더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근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 호흡을 쓰지요. 근육도 동글동글 부드러워졌답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소낙비가 쏟아졌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 씨(68)는 레고 블록 같았다. 단신에 단단한 상·하체, 사각형 얼굴 위로 올려붙인 머리칼…. 그에게서 비 냄새가 났다. 마른하늘에 비를 내리는 사람. 투두둑, 투두둑…. 궁편과 채편을 쉴 새 없이 오가며 후려치는 그의 손끝은 언제 어디서든 장단의 비를 쏟는다. 사물놀이에서 꽹과리는 천둥, 장구는 비를 상징한다.
“우리 장단을 치면 신기하게 흑인도, 백인도 다 이렇게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요. 리듬이야말로 그 민족이 가진 근본을 투영합니다. 브라질 축구를 왜 그냥 브라질 축구라 안 하고 삼바 축구라 부를까요. 모든 것은 리듬이기 때문이죠.”
28일부터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음악극 ‘김덕수전傳’이 열린다. 김덕수가 김덕수의 인생을 음악과 연기, 연희로 풀어내는 공연. 국악 그룹 ‘앙상블 시나위’ ‘사물놀이 본’이 음악을, 무용가 정영두가 몸짓을 보태지만, 뼈대는 김덕수 자신의 독백과 악가무(樂歌舞)다.
“음악 인생에서 가장 큰 환희는 역시 첫 경험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 남사당패였던 부친의 손에 이끌려 새미(어른 어깨 위에서 춤추는 무동)를 했던 것. 어른 세 명 위에 올라타니 천하가 다 내 눈 아래였죠. 그 장면이 아직도 눈가에 아롱아롱하네요.”
신동이었다. 7세 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탔다.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교) 1학년 때(1965년)부터 세계를 돌며 공연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쇼부터 올림픽까지 수많은 국제무대에 서면서 선진국 쇼 비즈니스의 생리를 체득했습니다. 우리의 장단을 지키면서도 낯선 청중을 빨아들일 수 있는 감각을 동물적으로 익혔죠.”
1978년, 지음(知音)인 김용배 최종실 이광수와 풍물을 현대화한 사물놀이를 만들어내 파란을 일으켰다. 물결은 바다를 넘었다. 1987년 일본 재즈 축제 ‘라이브 언더 더 스카이’는 그가 “지금도 생각하면 꿈같다”고 꼽는 무대다. 마일스 데이비스, 웨인 쇼터 같은 거장들과 무대를 공유했다.
“‘3박+2박’의 혼합박은 서양에서는 머리가 둘인 셈이지만, 우리 음악은 5박에 머리와 꼬리를 달아 하나의 악구(樂句) 안에 기승전결을 담아내죠. 포용력이 대단하고 독창적입니다. 한국어처럼요.”
김 씨는 “한국음악이 살 길은 결국 교육뿐”이라고 했다.
“입학해 배우는 첫 악기가 단소죠. 소리 내기도 힘들어 사람을 질리게 합니다. 단소를 과감히 버리고 타악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몸으로 느끼며 즐기는 식으로 교육을 바꿔가야 합니다.”
‘김덕수전’의 좌석은 예매 개시와 함께 매진됐다. 단, 29일 오후 7시 30분 공연은 네이버 브이라이브 생중계로 누구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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