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빈의 여상이 돼 희창에게 초빙됐던가, 막북의 이릉이 돼 흉노의 포로가 됐던가…(중략)…하늘이시여, 그의 앞에 은하가 가로놓여 있거든 오작교를 내려주시고, 약수로 막혔거든 파랑새를 보내주소서.’
1921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 일부입니다. 일제에 의해 1차 무기정간을 당한 뒤 다시 신문을 낸 것이 2월 21일이니 속간하자마자 이처럼 누군가를 애타게 부른 겁니다. 그 대상은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인 추송 장덕준(1892~1920)이었습니다. ‘추송 장덕준 형을 사(思)하노라’라는 이 사설은 하루아침에 소식이 끊긴 장덕준을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다 주(周) 문왕, 희창의 부름을 받은 여상(강태공), 현 고비사막 북쪽인 막북 전투에서 흉노의 포로가 된 중국 전한의 무장, 이릉에 빗댔습니다. 이어 돌아오지 않는 그의 앞을 은하수가 가로막고 있다면 오작교를, 약수(弱水‧부력이 약해 기러기 털도 가라앉았다는 중국 전설의 강)로 막혔다면 파랑새를 보내 날아오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동아일보 창간 주역인 장덕준은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 논설반 기자로 활약하며 짧은 기간에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10회 시리즈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을 집필해 조선통치에 관한 일본 어용학자들의 논리를 통박했습니다. 8월엔 중국을 방문 중인 미국의원단을 찾아가 스몰 단장을 인터뷰하고 이들이 경성에 오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달해 성사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장덕준은 폐병을 앓아 일본 유학 시절 요양원 신세를 지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어서 동아일보 입사 후 격론을 벌이다 피가래를 토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정이 많고, 기개와 담력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1920년 10월 함경북도 지방을 시찰하다 일제가 만주 간도에서 일본영사관 소실을 우리 동포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중이라 보도할 지면도 없었지만, 그는 “기자의 활동은 중단할 수 없다”며 간도로 향합니다. 1925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정 많은 그가! 피 많은 그가! 노모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위험하고 고단한 길을 단연히 떠나던 심정은…’이라고 이 상황을 전했습니다.
현지에 도착해 장암동 학살현장 등을 취재한 그는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냐 하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는 첫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끓는 피를 못 이겨 일본영사관과 토벌군사령부를 찾아가 만행을 추궁했던 그는 “그런 일 없다. 같이 가보면 알 것 아니냐”고 잡아떼는 일본군의 말에 종군기자로 따라나섰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20년 11월 10일 와타나베 회령 수비대장으로부터 ‘장덕준 씨가 향방(向方)불명됐다’는 전보를 받은 동아일보는 백방으로 행방을 조사했고, 그의 형 덕주 씨도 동생의 자취를 밟아 간도로 향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1921년 10월 28일자는 장덕준의 최후에 대해 ‘적의 군병이 말(馬)까지 가지고 와서 함께 가자고 강청(强請)해 부득이 따라간 바 그 후로는 일절 종적이 없어지고 말았는데, 적은 그를 꼬여 끌어내 암살한 일이 확실하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물론, 동아일보 또한 장덕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1년, 또 1년이 지나도 기적을 바랐지만, 창간 10주년 기념일인 1930년 4월 1일에야 추도회를 갖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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