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0월 청주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3학년생 베이스 연광철(사진)이 동아음악콩쿠르의 문을 두드렸다.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목소리가 좋다’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음악선생님이 되어 보겠다’며 택한 성악의 길이었다. 콩쿠르 예선에 나가 주변을 둘러보니 예외 없이 서울 명문 음대생들이었다. 그래도 웬만한 지역 콩쿠르를 정복한 뒤였기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 결과는 예선 탈락이었다.
“그래도 도움이 컸습니다. 주변에 동아음악콩쿠르를 나간 분도 없었어요. 서울의 음대생들은 어떤 곡을 경연곡으로 선택하는지, 어떤 점을 잘 준비하는지 처음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해인 1987년에는 서울의 큰 콩쿠르들에 나가 계속 2위에 올랐다. 그해 10월 재도전한 동아음악콩쿠르에서도 2등이었다. “국내 최고의 콩쿠르에서 인정받았으니 됐다 싶었어요. 세계로 나갈 꿈을 가져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가리아 소피아국립예술대와 독일 베를린국립음대에서 기량을 연마했다. 1993년 세계 정상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주최한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 소식은 동아일보가 단독 보도했다. 그해 도밍고와 함께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 출연한 소식도, 정명훈 지휘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에 출연한 소식도 동아일보를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그의 국내 첫 무대도 동아일보가 열었다. 1999년 12월 그의 초청독창회가 동아일보사 주최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청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슈베르트와 브람스, 풀랑크 등 독일과 프랑스 가곡을 노래하는 무대였다. “청중이 다가가기 쉬운 곡목들은 아니었어요. 주최 측이 선뜻 받아주어 감사했고, 성취감이 매우 큰 무대였습니다.”
독일 바이로이트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영국 로열오페라를 분주히 다니는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2010년에는 동아일보사와 서울시가 주최하는 ‘LG와 함께하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소프라노 에디트 마티스를 비롯해 세계 성악계를 대표하는 심사위원 8명을 초청하는 데 기여했다. 그해 우승한 루마니아 테너 슈테판마리안 포프는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 베네치아 라페니체 극장 등에서 주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큰 규모의 국제콩쿠르를 한국이 주최하고 전 세계의 명가수와 극장장을 초청하는 일이 뿌듯했습니다. 국가 브랜드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죠. 서울국제음악콩쿠르가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와 비교할 수 있는 콩쿠르로 성장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세계 음악계에서 한국인들이 가진 위치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유럽과 미국의 큰 무대가 부르는 손짓을 외면하기 아쉬워 5년 만에 교단에서 내려온 그는 2018년 독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이 최고의 성악가에게 수여하는 궁정가수 ‘카머젱거’ 칭호를 받는 등 전성기를 누려왔다.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친 지금 그의 발은 서울 자택에 묶여 있다. 독일 함부르크와 잘츠부르크 축제, 파리, 스위스 취리히 등의 무대가 잇따라 취소됐기 때문이다.
“제 나름대로 재충전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은 독일 예술 가곡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곧 음반도 녹음할 예정입니다.”
그는 “동아일보 사시에 문화주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문화계 발전에 계속 힘을 기울이는 신문이 되어주기 바란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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