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지상군 첫 전투 이끈 ‘스미스 부대장’ |
6·25전쟁 개전 초기인 1950년 7월 5일, 경기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였다. 미 지상군이 6·25전쟁에서 치른 첫 전투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6시간 15분간의 교전 끝에 탱크 4대를 파괴했으나 17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지연작전 덕분에 한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이 부대를 이끌었던 찰스 스미스 예비역 준장(당시 중령)은 1975년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6·25전쟁 이후 생사가 불분명했던 그를 찾아낸 것도, 한국 정부를 설득해 최고 훈장을 수여하게 한 것도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 회장은 “누군가 오보를 해서 스미스가 6·25 때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1968년 오산전투 추도식 때 한 중령이 ‘스미스 장군이 지금 애리조나에 살고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미 육군사관학교의 1939년 졸업생 명단을 확인해 애리조나주 피닉스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지 회장은 2년 뒤 피닉스에서 스미스 씨와 만났다. “한국에서 무슨 훈장을 받았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고 했다. 가방에 있던 태극기를 전해준 뒤 귀국해 정부에 태극무공훈장 수여를 건의했다. ![]() 스미스 씨는 6·25전쟁 25주년이었던 1975년 7월 방한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날 저녁 지 회장을 찾아가 이렇게 고백했다. “이 훈장은 내 것이 아닙니다. 전사한 전우들의 것이요, 한 위생병의 것입니다.” 스미스 씨는 1950년 7월 5일 오후 2시 반 후퇴 명령을 내렸는데 한 위생병이 손을 들더니 “나는 후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곳에 부상자가 있어서 자신은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스미스 씨는 “오늘 큰 훈장을 받고 나니 그 위생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고 지 회장은 전했다. 스미스 씨는 2004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
“여의도 아파트 팔고, 돈 마련…” 美서 ‘김일성 승용차’ 획보 나선 그 |
![]()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93)은 사재를 털어가며 6·25전쟁 관련 전사품(戰史品)과 기록물들을 수집해온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물건이 없어지기 전에 수집해서 한국 땅에 갖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 지 회장이 수집한 전사품과 기록물들은 여의도 안보전시장에 전시됐다가 안보전시장이 사라진 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과 경남 사천의 항공우주박물관에 기증됐다.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B-29 전략폭격기도 그가 1972년 미 해군에게서 인수한 뒤 분해해 국내로 가져온 것이다. 상속 받은 9000평(약 3만㎡) 규모의 광주(光州) 과수원을 팔아 전사품과 기록물들을 구입하고 유엔군 참전기념비도 세웠다. ![]() 그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전사품은 김일성 승용차다. 미국의 자동차 수집가가 차 가격으로 제시한 거액을 지불하기 위해 서울 아파트를 팔기로 결심했을 정도다. 1948년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소련제 승용차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던 국군 6사단이 1950년 10월 청천강변에서 노획했다. 청천강 다리가 끊어져 지나갈 수가 없게 되자 버리고 간 것이었다. 지 회장은 “당시 청천강변에 고급차들이 여러 대 있었으며 이중에 김일성 승용차가 있었는지 몰랐다”며 “주워온 셈”이라고 말했다. ![]() 지 회장에 따르면 국군이 김일성 승용차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경위는 이렇다. 6사단 부사단장이 다른 사단장으로 전근가면서 전별금 대신 이 차를 받아 타고 갔다. 평양에 들어가니 모여든 시민들이 “이거 김일성 승용차인데 잡았냐”고 물었다. 이 승용차를 타고 서울에 들어오자 이번엔 평양 피난민들이 이구동성으로 “김일성 잡았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국방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김일성 승용차를 노획했다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은 6·25전쟁 중 교통사고로 숨진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의 부인에게 선물했다. 김일성 승용차는 1951년 7월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지 회장은 “워커 사령관의 부인이 차를 인수해 텍사스 집으로 향하다 고장이 나 주유소에서 다른 자동차와 교환했다”며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지 회장이 1981년경 미군 참전용사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인 자동차 수집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에게 미국에 간 김일성 승용차가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동차 전문잡지에 김일성 승용차를 찾고 있다는 글을 기고했다. 이를 본 소유주는 뉴욕의 한국 총영사관에 편지를 보내 언제 노획했는지 등 자동차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비싸게 팔기 위해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 신문이 1983년 뉴욕발 기사를 통해 ‘김일성 승용차 뉴저지에 있다’고 보도했다. 지 회장은 이 기사를 보고 뉴저지 주로 가 수소문 끝에 소유주를 만났다. 그는 15만 달러를 내면 차를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지 회장은 “당신이 한국에 기증해주면 당신 이름이 영원히 남도록 하겠다”고 역제안했다. 하지만 계속 돈을 요구해 깎고 깎고 해서 7만 5000달러까지 가격을 낮췄다. 지 회장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와 상의해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를 팔기로 했다. 이후 걸림돌이 나타났다. 상공부에 알아보니 자동차를 수입하려면 세금으로 200%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을 떼기로 결심하고 한 방송사에 자동차가 있는 미국 주소를 알려줬다. 이 보도가 나간 뒤 한국 정부가 관심을 보여 1984년 국내로 가져올 수 있게 됐다. 비용을 대우자동차가 부담해 아파트는 팔지 않았다. 지 회장은 “김일성 승용차를 14년간 추적해 국내로 들여왔다”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일성 승용차는 2013년 전쟁기념관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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