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마라. 온 국민이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국민을 속일 셈이냐. 대체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흥! 독립?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하는 자들은 모두 폭도들이야.”
“뭐? 폭도라고?”
친일파 민원식을 척살한 뒤 도쿄경시청에서 조사받고 있는 양근환. 사진 위로 겹쳐진 글씨는 주소와 이름을 쓴 그의 자필이다.
1921년 6월 7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양근환(1894~1950) 1차 공판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를 토대로 그가 민원식을 처단하기 직전 상황을 재구성해본 것입니다.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은 일본과 조선이 합쳐 탄생한 신일본의 발전에 조선인도 기여해야 한다는 ‘신일본주의’를 주창해 일제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했지만, 1921년 2월 16일 숙소인 도쿄역호텔 14호실에서 최후를 맞았죠. 양근환은 ‘2000만 동포의 치욕’인 민원식의 몽매함을 깨우쳐줄 생각으로 그를 찾아갔는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독립운동가들을 폭도로 매도해 말다툼 끝에 흉기로 찔렀다고 진술했습니다.
동아일보는 보도통제가 풀린 직후인 3월 2일자 3면에 11개의 기사를 실어 양근환의 활약을 대서특필했습니다. 단순 사실보도에 그치지 않고 양근환의 형과 친구까지 취재해 그의 성격과 인간적 면모도 부각했습니다.
1921년 6월 7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양근환의 1차 공판 모습. 타원형 사진은 방청 온 그의 일본인 부인 가츠코와 딸.
이에 따르면 기골이 장대한 양근환은 담대하고 협객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20대 초반 조선보병대에 다닐 적엔 일본인들이 자신을 보고 ‘요보’(조선 사람을 비하해 부른 말) 운운하자 홀로 여럿을 제압했고, 민원식을 척살한 뒤 도쿄로 호송될 때도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립을 희망한다. 일본인들도 조선 독립을 자기 일처럼 여겨 달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일본경찰도 그를 국사범(國事犯)으로 대우해 결박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양근환은 불의를 참지 못했지만 원래 심성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맨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국수와 인삼을 팔고, 신문배달과 철공소 일을 해 어렵게 대학에 다니면서도 동료 고학생들에게 돈과 밥을 나눠줬습니다. 거사 직후에는 꽃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못 볼 네 살, 두 살 딸에게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진작 상하이로 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발목을 잡은 딸들이었죠.
12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양근환(아래)이 1933년 2월 23일 그의 딸, 친형과 함께 동아일보를 방문했다.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양근환의 공판기, 수감 생활, 감형 소식, 그리고 그의 가족의 근황까지 낱낱이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양근환도 자신의 심경을 담은 옥중편지를 여러 차례 동아일보에 보냈습니다. 홍수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하느님은 왜 우리 땅을 그렇게도 울리시는지. 나의 괴로움을 잊고 종일 울었습니다’(1925년 8월 12일자)라고 동정했고,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조롱에 든 새는 항상 날기를 잊지 못하고, 외양간에 매인 말은 항상 달음질을 생각합니다’(1925년 9월 26일자)라 표현했죠.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무정한 아비를 평생 못 만난다 한들 원망하지 마라. 이 아비의 사랑은 좀 더 크고 깊은 데 있다’고 조국에 몸을 바친 비장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1929년 12월 2일자)
양근환은 당초 무기징역 형을 받았지만 몇 차례 감형된 끝에 12년이 지난 1933년 2월에야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았지만 정당 난립으로 혼란이 커지자 각 당 대표협의회를 주선해 해결책을 모색했고, 교육과 언론에 관심을 보여 영재 양육기관인 사회학무원의 원장, 혁신보 및 신민보의 사장을 지냈습니다. 혁신탐정사와 건국청년회를 조직해 반공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6·25전쟁 와중에 인민군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