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 대표 안재훈 감독(53)의 작업실 벽에는 포스트잇, A4용지, 한지 등이 빼곡히 붙어 있다. 안 감독이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상, 자신만의 애니메이션 제작 철학 등을 적어 놓은 것들이다.
작업실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액자가 보인다. ‘흙이 주는 생명보다야 못하겠지만 나의 경험과 헌신의 노력으로 그린 그림이 누군가에게 단초가 되기를.’ 16일 이곳에서 만난 안 감독은 이 액자 글귀처럼 한국인으로 살아온 53년의 경험과 그림체의 섬세함을 살리기 위해 장면 하나하나를 연필로 그려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었다.
1970∼1990년대 향수를 고루 담은 ‘소중한 날의 꿈’(2011년)에 이어 안 감독은 김동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애니메이션 ‘무녀도’로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이 영화제는 세계 최대 애니메이션영화제로 15∼30일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안 감독은 ‘한국인에게 바치는 사랑’이라는 프로젝트로 한국 근·현대 단편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왔다. 지금까지 ‘메밀꽃 필 무렵’(2012년), ‘운수 좋은 날’(2014년), ‘봄. 봄’(2014년), ‘소나기’(2017년)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 무녀도는 다섯 번째 작품이다. 무속신앙을 믿는 무녀 모화와 기독교에 귀의한 아들 욱이의 대립이 주된 이야기다.
“이제까지는 한국인의 보편적 생활상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무녀도는 무속신앙이라는 강렬한 소재를 다뤄요. 유럽도 수많은 종교 갈등의 역사를 지닌 만큼 무녀도의 서사를 생소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소설에 자주 묘사되는 모화의 굿판이나 푸닥거리 장면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안 감독은 국가무형문화재 무녀들을 만나 생김새부터 복장, 굿 소리는 물론이고 신령에 감응해 자신도 모르게 새나오는 흥얼거림까지 관찰했다. 지난해 별세한 국가무형문화재 김금화 만신을 비롯해 안 감독이 만난 무녀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공통점을 참고해 모화의 얼굴을 그렸다.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새로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살면서 인간문화재 무녀들을 만나는 경험은 흔치 않으니까요.”
작품에 한국을 담는 안 감독의 노력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살아오름’이 내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을 밥 먹듯 하는, 꿈도 희망도 없는 20대 여성이 실제로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생존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그렸다.
“한국 애니메이션 창작자가 갖는 강점은 ‘개인의 경험’이에요. 세계 어느 애니메이션 감독도 민주화, 세월호 참사, ‘촛불혁명’, 남북 분단을 경험하지 못했어요. 한국 창작자만의 경험이 시대와 세계, 사람을 다르게 보는 눈이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 창작자의 빛깔에서 오는 특별함을 세계인이 느끼는 순간이 오길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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