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 30대 워킹맘도, 플립 턴 하는 70대 할머니도 여기선 모두 ‘유망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9일 15시 37분


◇거북이 수영클럽 / 이서현 지음 / 192쪽·1만2900원·자그마치북스

동네 수영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무서운 속도로 오픈턴을 하며 자유형 대시를 끝도 없이 해나가는 고수도 있지만 레일 끝에 붙어서 수다 삼매경에 빠진 아주머니들도 있고, 자기도 잘 못하면서 다른 사람 자세 계속 지적하고 있는 아저씨, 뭍에 나온 생선처럼 퍼덕거리는 아가씨, 수영장에 운동하러 온 건지 워터파크에 연애하러 온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연인들도 있다.

13년차 신문기자이자 워킹맘으로 매일을 전력 질주하듯이 살아온 저자는 디스크에 이어 갑상선암이란 ‘불행의 콤보’를 달고서 이 북적거리는 동네 수영장에 쭈뼛거리며 들어선다. 다치지 않는 안전한 운동이라서 선택한 수영은, 그런데 뜻밖에도 완벽하게 질주하는 것만이 최선의 삶이라는 신념의 중력을 무력화시키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수영을 배운 첫날 선생님이 초급반 수강생들에게 말한다. “우리 오늘은 아무 것도 안 할 거구요. 그냥 다 같이 물에 둥둥 떠볼 거예요.” 물에 가만히 떠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낯설고 평온한 시간을 마주하고야 저자는 생각한다. “물이라는 거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닥도 저렇게 잘 보이고, 원하면 언제든지 발 딛고 설 수 있어 … 힘을 다 빼고 물에 몸을 맡기면 언제든 둥둥 뜰 수 있어. 보노보노처럼!”

사회에서는 ‘초급이라 못해요’라는 변명이 더는 통하지 않는 ‘짬밥’이 됐지만 수영장에서는 다르다. 평영 킥을 하는데 자꾸 뒤로 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만세 접영’을 하면서 심각한 ‘저병’(접영을 못하는 증상) 환자임을 드러내도 용서가 된다. 수영장이란 이 이상한 우주에선 치열한 삶의 대가로 이런 저런 병을 안고 온 30대 워킹맘도, 저 연세에 어떻게 플립 턴을 하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70대 할머니도 모두 ‘유망주’이기 때문이다. 느려도 괜찮고, 누군가를 추월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 속도로 물속에 곧게 뻗은 푸른 직선을 따라’ 그저 묵묵히 물살을 가르면 된다.

“바야흐로 속성과 선행의 시대. 나는 오늘도 그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유유히 거슬러 ‘거북이 수영클럽’으로 향한다. 그 안에서 매일 분명 수영이 아닌 이상한 훈련을 반복하는 중이다.”(‘거북이 수영클럽’)

‘뭍’에서 완벽주의자를 지향하며 살아온 작가는 ‘물’에서 가장 느린, 하지만 행복한 거북이가 됐다. 수영을 배우는 초급자가 겪게 되는 유머러스한 에피소드와 주변 어디에나 있는 동네 수영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풍경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 삶과 시대를 읽는 경쾌한 은유가 됐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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