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친일파 기준은? 셋 중 하나에 해당하면 포살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0일 10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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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4월 23일


플래시백

일제 강점기, 이름 없는 민초(民草)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는 조선총독도, 칼 찬 일본순사도 아니라 일제의 앞잡이, 친일파였습니다. 우리 사정을 잘 아는 동족이니 뭐라도 숨길 수가 없었으니까요. 독립운동단체 신한독립당의 1923년 조사에 따르면 친일파는 전국적으로 7254명에 이르는데 순사가 가장 많고 이어 밀정, 면장·면서기, 군 참사, 군수 등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친일파였을까요? 동아일보는 1922년 4월 9일자 사설 ‘약자의 비애-배일과 친일’에서 ‘자신의 복을 구하려고 양심을 기만하는 자는 친일, 자기 양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는 배일(排日)’이라고 했습니다.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기준이 좀 애매하죠?

좀 더 구체적인 것은 1921년 4월 23일자 ‘삼포살(三砲殺)을 선전’이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에 나옵니다. 3·1운동 직후 항일의병 출신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대한독립단 단원들이 6명씩 무리지어 다니며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면 친일파로 보고 포살(총살)키로 했다는 내용입니다. △적의 견마(犬馬)가 돼 동포의 피를 빠는 자 △적과 내통하고 무기를 제공하는 자 △일본 학교를 경영해 아이와 청년들이 적에게 접근하게 하는 자입니다. 실제로 암살단을 조직해 친일세력을 처단했던 대한독립단이 이 세 유형을 총살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걸 동아일보에서 본 친일파들은 크게 위축됐을 겁니다.

이완용 저격을 알린 1909년 12월 23일자 대한민보 기사. 동아일보는 15년 뒤인 1924년 11월 18일자에 이 대한민보 지면을 그대로 전재했다.
이완용 저격을 알린 1909년 12월 23일자 대한민보 기사. 동아일보는 15년 뒤인 1924년 11월 18일자에 이 대한민보 지면을 그대로 전재했다.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줄기차게 친일파 척결 관련 보도를 했습니다. 먼저 매국노 이완용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22세 청년 이재명의 칼을 맞고 사경을 헤매던 때가 1909년입니다. 그런데 이재명과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이동수가 1924년 체포되자 동아일보는 15년 전 의거를 ‘소환’해 당시 상황을 소상히 밝힌 기사를 11월 12일자부터 싣습니다. ‘이완용이 인력거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세 사람의 자객이 번개 같이 달려들어… 흰 눈벌판에 붉은 고랑을 이뤄놓은 그들은 과연 누구였던가’로 시작되는 10회 시리즈였습니다.

당시 이재명 이동수 등의 이완용 암살 기도를 충실하게 보도한 신문은 항일 민족지 대한민보였습니다. 창간 전이었던 동아일보는 파격적으로 이완용 저격을 다룬 대한민보를 그 제호와 함께 1924년 11월 18일부터 나흘 연속 전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이듬해에는 이동수 공판을 앞두고 1910년 4월 대한민보에 실린 이재명 공판기를 지면에 연재했죠.

이재명과 함께 이완용 암살을 도모했던 독립운동가 이동수. 15년 동안 피신생활을 했으나 1924년 검거됐다.
이재명과 함께 이완용 암살을 도모했던 독립운동가 이동수. 15년 동안 피신생활을 했으나 1924년 검거됐다.
대한민보의 표현에 따르면 ‘구생’(구차하게 살아남)한 이완용은 결국 1926년 2월 11일 병사합니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횡설수설’을 통해 ‘구문공신 이완용이 입적한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고 썼습니다. 구문(口文)은 흥정을 붙이고 받는 돈이라는 뜻인데, 나라를 팔아 후작이 된 이완용에겐 구문공신, 구문후작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수식어가 붙었었죠. 전북 익산에 있던 이완용 묘는 여러 차례 훼손돼 경관이 지키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횡설수설’은 ‘생전에도 보호 순사가 아니면 몇 발짝도 옮기지 않던 이완용이었는데…’라고 꼬집었습니다.

1925년 2월 12일 이동수 공판이 열린 경성지방법원 앞 방청객의 행렬. 그러나 일본인 재판장은 공안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방청을 금지했다.
1925년 2월 12일 이동수 공판이 열린 경성지방법원 앞 방청객의 행렬. 그러나 일본인 재판장은 공안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방청을 금지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9월 1일자에는 ‘친일파 토벌사건 공판기’를 실었습니다. 그 전 해 6월, 만주에서 대한통의부 단원들이 밀정 정갑주를 총살한 사건 공판에서 피고 김병현은 판사의 말 같지 않은 심문에 시원한 ‘사이다 진술’을 합니다.

- 통의부는 뭐하는 것이냐.

“조선독립을 하고자 하는 운동기관이다.”

- 군사조직은 뭘 하려고? 누구와 싸우겠다는 것인가.

“독립전쟁을 하려는 것이다. ○○(일본)하고 싸우지요.”

- 정갑주는 왜 죽였는가.

“그놈이 우리 동지를 잡아 일본사람에게 준 일이 있으므로 죽였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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