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임신한 채 평양 도청 폭탄 공격…젖먹이 안고 재판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3일 11시 40분


1921년 6월 12일



플래시백
1920년 8월 3일 평안남도 도청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평양부청과 평양경찰서도 공격 대상이었죠. 하지만 무사했습니다. 비가 온 바람에 심지가 젖어 불이 붙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이 폭탄 공격은 임시정부 지시 아래 광복군총영 제2결사대가 주도했습니다. 이 결사대에는 홍일점, 그것도 임신 3개월쯤의 여성투사가 포함돼 있었죠. 32세 안경신이었습니다.

거사 직후 안경신은 멀리 떨어진 함경남도 이원군으로 숨어 들어갔죠. 하지만 눈에 불을 켠 일제 고등계 형사들 손에 이듬해 3월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체포됐을 때는 젖먹이 아들이 옆에 있었죠. 몸을 푼 지 12일밖에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 소식은 신문에 ‘여자 폭탄범’으로 실렸습니다. 일제하 최초의 여성 의열투쟁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죠.

이 의거는 미국 의원단의 조선 방문에 앞서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알리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전과 의열투쟁을 병행했고 동아일보는 의원단의 방문을 성사시키고 보도하는데 앞장섰죠. 장덕준 논설반 기자는 기사를, 동생인 장덕수 주간은 사설을 각각 썼습니다. 장 씨 형제의 막내인 장덕진은 안경신이 소속된 결사대의 대장이었죠. 미 의원단의 조선 방문 내용은 4월 21일에 올린 ‘동아플래시100’으로 소개했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6월 12일자에 실린 안경신의 모습(왼쪽). 사진 한 장 없이 그림으로만 남은 것은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의 처지를 반영한 듯하다.  장덕진(오른쪽)은 큰형 장덕준(동아일보 논설반 기자)과 작은형 장덕수(동아일보 주간)가 펜으로 일제에 맞선 것과는 달리 총을 들고 일제와 싸웠다.
동아일보 1921년 6월 12일자에 실린 안경신의 모습(왼쪽). 사진 한 장 없이 그림으로만 남은 것은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의 처지를 반영한 듯하다. 장덕진(오른쪽)은 큰형 장덕준(동아일보 논설반 기자)과 작은형 장덕수(동아일보 주간)가 펜으로 일제에 맞선 것과는 달리 총을 들고 일제와 싸웠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을 마친 뒤 집에 있던 안경신은 3·1운동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붙잡혀 29일간 구류를 살았죠. 이때부터 안경신은 독립운동에 발 벗고 나서 8개월 뒤 평양에서 결성된 대한애국부인회에 가세했습니다. 모금활동에 앞장서 임시정부에 모두 2700원을 송금하는데 크게 기여했죠. 그때 2700원은 지금 1억3000만 원이 넘는 돈입니다. 그는 일제가 대한애국부인회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몸을 피해 활동하다가 의열투쟁에 투신했던 것입니다.

안경신의 재판은 뜨거운 관심사였습니다. 여자 폭탄범인데다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려가며 재판을 받았으니까요. 평양지방법원은 1921년 6월 안경신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제2결사대 중 안경신만 붙잡혔기 때문에 보복성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안경신이 노린 평양경찰서 공격은 실패한 점을 감안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죠. 동아일보는 ‘휴지통’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여자의 사형선고는 안경신이가 처음인 듯’이라고 전했습니다.

안경신은 즉각 항소했습니다. 평양복심법원은 이듬해 4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죠. 그 사이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와 결사대장 장덕진이 '안경신은 이 의거에 직접 관련이 없으니 감형이나 무죄방면이 옳다'며 여러 곳에 보내온 석방건의문도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하지만 안경신은 재판장에게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10년 징역에 처하느냐”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죠. 안경신의 모친도 딸의 허리를 붙잡아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27년 12월 안경신이 평양감옥 문을 나섰습니다. 가출옥된 것이죠. 하지만 그는 서러운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모친은 딸이 옥에 갇힌 뒤 곧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혈육인 아들은 앞을 보지 못했죠. 동지 장덕진은 1923년 숨졌고요. 이해 12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만 동지 장덕진 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

안경신은 동아일보 1962년 2월 24일자에 다시 나옵니다. 3·1절 43주년을 맞아 ‘건국공로 단장’을 받는 132명 중 한 명이었죠. 단장은 지금의 독립장입니다. 하지만 이 훈장은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죠.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연락할 가족도 모르기 때문이죠. 출옥 직후에는 오빠 집에 머물렀다고 했지만 그 후는 알 수 없고 남편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진 한 여성은 이렇게 이름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