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6월 3일자 동아일보 1면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 1회가 실립니다. 민족 신문인 동아일보에 말이죠. 그것도 무려 8월 31일자까지 매번 1면에 장기 연재합니다. 조선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레닌 전기였죠.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를 제대로 알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이해 1월 사회주의 성향의 서울청년회가 조직돼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 입김이 커질 정도로 사회주의 바람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의 본명입니다. 1870년 볼가 강변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난 그는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황제 암살음모에 연루돼 사형당하면서 혁명의 길로 발을 내딛습니다. 페테르부르크대학을 마치고 변호사로 잠깐 활동했지만 이마저도 곧 헌신짝처럼 버렸죠. 제정러시아의 사법제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의 후진국으로 많은 농노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죠. 농노를 ‘죽은 영혼’ 또는 ‘세례를 베푼 재물’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레닌은 농민보다는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노동자에 집중합니다.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레닌은 1897년 시베리아로 추방된 이후 20년간을 추방 유형 망명으로 점철된 시련의 세월 속에서도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죠.
그는 시베리아 유형이 끝나자 해외에서 잡지 ‘이스크라’를 창간합니다. ‘불꽃’이라는 뜻이지요. 1901년 이 잡지에 ‘무엇으로부터 착수할 것인가’ 논문을 발표하고 이를 다듬어 이듬해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펴냅니다. ‘레닌주의’의 핵심을 담았죠. 1903년 제2회 사회민주당 대회가 열리자 레닌은 다수파를 뜻하는 볼셰비키를 이끌며 당을 분열시킵니다. 비웃는 상대에게 “최후에 웃는 자가 정말로 웃는 자다”라고 오히려 비웃어주죠. 볼셰비키는 이후 소수파로 몰리지만 수적 열세를 폭력과 테러를 앞세워 돌파합니다.
레닌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제국주의전쟁 반대’와 ‘차르정부 타도’를 주장합니다. 애국심에 불타 전쟁에 찬성했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는 정반대였죠. 국제노동자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라며 갈라서고 ‘무배상 무병합 즉시평화 민족자결’을 외칩니다. 이 무렵 ‘성자 라스푸틴이 없으면 황태자도 없다’며 황후가 떠받들던 ‘괴승 라스푸틴’이 암살되죠. 러시아 곳곳에서 ‘우리에게 빵을 달라’며 파업과 유혈폭동이 일어나며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습니다.
황제가 쫓겨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한편으로 각지에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도 생겨났습니다. ‘이중 권력’의 시기였죠. 레닌은 망명지에서 ‘봉인 열차’를 타고 독일을 거쳐 돌아옵니다. 그는 즉각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임시정부 타도’를 외칩니다. 자산가계급의 수단이 되지 말라며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죠. 1917년 10월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입니다.
글을 쓴 기자는 러시아혁명은 90%가 레닌 덕분이라고 점수를 줍니다. 레닌은 돈과 명예로 현혹되지 않고 가난과 비천함의 영향도 받지 않으며 위협과 무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죠. 혁명가가 갖출 요소는 오직 사상과 주의와 성력(誠力)이라는 겁니다. 레닌이 보여준 것처럼 노동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긴다는 점은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고도 했죠.
이 연재물은 논설반 기자 김명식이 썼습니다. 레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짐작하듯이 김명식 본인이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아직 ‘강단 사회주의자’ 단계라고 볼 수 있겠지만요. 김명식이 동아일보를 떠나 새로운 활동을 할 때 레닌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주간 장덕수도 레닌으로부터 뜻밖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 내용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끝으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는 지면에 표기된 61회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7월 7일자가 20회였는데 7월 8일자는 22회로 건너뛰었죠. 연재를 오래 이어가다 보면 이런 실수가 간혹 나오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연재물은 총 60회로 마무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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