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21년 8월 17일자 3면에 실린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친아버지 박시규의 한 맺힌 말입니다. 박상진은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1918년 2월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 1년 6개월 만에 37년의 생을 마감했죠. 박상진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최대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체포되기 전 안동의 한 마을에 숨어 망명 기회를 엿보던 박상진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친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직후였죠. 친어머니를 임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일제 경찰 눈에 핏발이 서 있었을 무렵이었죠. 고향에 가는 즉시 잡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망명보다 효도를 우선했고 결국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박상진은 1884년 울산에서 7000석지기 유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매년 44㎏ 기준 쌀 3만5000가마를 거두는 부호였죠.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모두 문과에 급제해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큰아버지 박시룡에게 입양 간 그는 14세 때 스승 허위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허위는 을미의병으로 일어섰고 을사늑약 뒤에는 의병 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 군사장으로 활약했던 유림이었죠. 박상진은 허위가 1908년 교수형을 당하자 피신한 가족을 대신해 서대문감옥으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1908년은 박상진이 신학문인 법률과 경제를 배우던 양정의숙을 졸업하던 해였습니다. 2년 뒤 판사 등용시험에 합격했지만 평양지원 발령을 마다하고 사직했죠. 그는 양정의숙을 다닐 때 이미 평민의병장 신돌석, 김좌진과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연결망을 짜놓았습니다. 1910년 무렵에는 안창호가 주도한 신민회에 참여했죠.
신민회 해산 뒤에는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 난징 등을 오가며 할 일을 찾았습니다. 양정의숙의 학우들과는 곡물무역업체 상덕태상회를 세워 군자금을 마련했죠. 마침내 1915년 7월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세우고 총사령이 됩니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우는 것이 목표였죠.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경주 우편마차나 운산금광 현금수송마차 습격에 나섰습니다. 허위가 추천해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이 의병 봉기 때 약속한 돈을 주지 않고 밀고까지 하자 처단했고 주민 원성이 높았던 충남 도고면장 박용하도 처치했습니다. 이 일로 일제의 대대적 검거바람이 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자 친아버지는 일본 도쿄까지 가서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죠. 김좌진은 1919년 경성으로 잠입해 종로구치감에 있던 박상진을 탈옥시키려고 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친아버지는 싸늘하게 식은 아들을 두고 형님 걱정까지 하며 눈물짓습니다. 팔십 노인이 양자의 사망 전보를 보고 놀라 줄초상이 날까봐 불안했던 것이죠. 박상진의 동생은 3일 전 아들을 면회하게 해 달라고 해서 연락했는데 아들도 못보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기자가 부친과 동생을 만난 날은 8월 11일이지만 기사가 17일자에 실린 이유는 검열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일제는 박상진 운구 때 군중이 몰리지 못하도록 막아 장례식을 새벽 3시에 치를 수밖에 없었죠.
박상진은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복벽파에서 공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비밀 암살 폭동 명령의 4대 강령을 실천했던 그의 사상은 이후 신간회와 의열단으로 전해졌죠. 그의 동생과 아들은 대한광복회의 뒤를 잇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으로 활동해 형님과 부친의 뜻을 이어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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