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발생(emerge)했을 때 이 행성이 있던 공전 위치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 네 생일이네!)”
“자식이 종이에 왁스를 입혔다. 지속 보존고에 붙여 놓겠다. (=얘가 그린 그림 좀 봐. 냉장고에 붙여놓을게.)”
최근 출간된 미국 만화가 네이선 W 파일의 ‘낯선 행성’(시공사·사진)은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짤막한 유머로 에둘러 던지는 만화책이다. 지구의 생활방식과 영어를 학습한 외계인이 더듬더듬 배움을 실천하는 이야기. 냉장고를 ‘지속 보존고(sustenance preserver)’라 표현하고, 풍선을 ‘신축성 숨 가두리(elastic breath trap)’라 부르는 서투름이 빚어내는 언어유희가 이 책의 백미다.
어설프게 번역했다가는 어색한 실소만 짓게 만들기 쉬운 내용이다. 적절한 한국어로 영어 개그의 분위기 전달과 뜻 해석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번역자 황석희 씨(41)의 이름을 확인하고 대부분 마음을 놓을 것이다.
황 씨는 한국 영화 관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타 번역가다. 끊임없이 쫑알대는 안티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데드풀’(2016년) 개봉 후 “번역자에게 상을 줘야 한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년)가 감독 루소 형제가 언급할 정도로 심각한 오역 논란에 휘말린 후 “후속편 ‘엔드게임’ 번역은 황석희에게 맡겨 달라”는 팬들의 요구가 빗발치기도 했다.
책 출간을 맞아 동아일보와 가진 e메일 인터뷰에서 황 씨는 “거의 모든 단어를 일반적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만 사용한 게 재밌었다”고 말했다.
“‘change’라고 하면 될 상황에서 굳이 ‘alter’를 쓴다든가…. 의미가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른 단어들을 골라서 사용했어요. 그게 낯설면서 우스워요. 책 전체가 기발한 위트로 채워져 있어서 번역하는 재미가 컸어요. 가급적 영어 원문을 함께 읽기를 권합니다.”
피자라는 단어를 모르는 책 속 외계인은 전화로 주문을 하며 “방대한 원형 반죽 위에 식용 가능한(edible) 것들을 다양하게 쌓아 달라. 곰팡이 슬라이스도 추가해 주고”라고 말한다. 한국어 단어를 세심하게 선택해 영어생활권에서만 통할 만한 농담을 무난하게 번역해내는 황 씨의 솜씨를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번역은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파악해 온전하고 충실하게 옮기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은 실패의 기술’이라고 한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말에 동의해요.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고, 번역자는 늘 원문과 싸우다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불가능한 승리를 꿈꾸며 무리하는 것보다 현명한 실패와 패배의 길을 모색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최근 뮤지컬 번역으로 작업 영역을 넓힌 그는 블로그를 통한 ‘애프터서비스 번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류가 발견되면 블로그에서 사과하고 DVD와 블루레이 자막을 수정한다. 황 씨는 “소통로를 통해 무례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닫아도 블로그는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은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꾸역꾸역’ 억지로 하는 거죠. 프로라면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요. 나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번역자인 아내가, 다행히 늘 큰 힘이 돼 줍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