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100년 전 여성 인권 부르짖던 나혜석, 그녀의 삶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8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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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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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서 전람회를 열기는 조선에서 처음이라 할 것이요,…섬섬옥수로 가볍게 붓을 놀려 그려낸 화폭은 완연한 여성미가 아닐까 한다.’

1921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 3면 ‘양화가 나혜석여사, 개인 전람회 개최’ 기사의 일부입니다.

창간사에서 3대 사시 중 하나로 ‘문화주의 제창’을 천명한 동아일보는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을 일찌감치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로는 첫 서양화가이자 동아일보 창간 동인인 고희동, 1916년 국내 서양화가 최초로 개인전을 연 김관호 등이 있었지만 여성으로서는 단연 나혜석이 최초이자 으뜸이었으니까요.

1921년 3월 첫 개인전을 연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그는 개인전에 앞서 ‘이 땅의 여성들에게 그림에 대한 관심을 불어일으키기 위해 개인전을 열게 됐다’는 취지의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1921년 3월 첫 개인전을 연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그는 개인전에 앞서 ‘이 땅의 여성들에게 그림에 대한 관심을 불어일으키기 위해 개인전을 열게 됐다’는 취지의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나혜석도 2월 26일자 기고 ‘회화와 조선여자’에서 화가를 ‘환쟁이’라 천시하는 풍토를 바꾸고 조선 여자들의 그림 소질을 일깨워주기 위해 개인전을 연다는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이 개인전에는 첫날 1000여 명, 이튿날에는 안내조차 포기할 정도로 관람객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문화생활에 굶주린 조선 민중들은 유화라는 서양 그림이 신기했을 뿐 아니라 나혜석 개인에 대한 관심도 컸을 겁니다.

나혜석이란 이름이 동아일보에 처음 나온 건 창간 열흘째인 1920년 4월 10일자입니다. ‘오늘 오후 3시 결혼식을 거행하는 김우영 씨와 나혜석 양’이라는 설명과 함께 신랑신부 사진이 실렸습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한 교토제국대학 출신 김우영도 명사였지만,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여권 신장을 부르짖는 글도 여러 편 발표한, 그리고 3·1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한 신여성의 대명사 나혜석은 요즘 말로 ‘최고의 셀럽’, ‘엄친딸’이었습니다.

나혜석이 1934년 8월 잡지 ‘삼천리’에 쓴 글에 따르면 그는 전처와 사별한 뒤 열렬히 구애해온 김우영에게 결혼을 승낙하며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일생을 두고 나를 사랑할 것, 그림 그리기를 방해하지 않을 것, 시어머니나 전실 딸과 떨어져 살 것. 김우영은 신혼여행 때, 죽은 나혜석의 전 애인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주기도 했죠. 둘은 3남 1녀를 낳고 장기간 구미여행을 하는 등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듯했습니다.

나혜석은 결혼 후 당시 최고 미술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선전)에 꾸준히 출품해 1926년 ‘천후궁(千後宮)’으로 특선의 영광을 안으며 전성기를 맞습니다. 글쓰기도 게을리 하지 않아 소설, 희곡, 수필, 시를 발표했습니다. 기고도 활발히 했는데 1921년 9월 동아일보를 통해 문인이자 역시 신여성이었던 김원주와 벌인 ‘부인의복 개량’ 논쟁은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나혜석의 대표작들. 위로부터 ① 1921년 3월 19~20일 첫 개인전에 선보인 정물화 ②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특선작 ‘천후궁’ ③ 1920년대 후반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화상 ④ 1931년 제10회 선전 특선작 ‘정원’.
나혜석의 대표작들. 위로부터 1921년 3월 19~20일 첫 개인전에 선보인 정물화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특선작 ‘천후궁’ 1920년대 후반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화상 1931년 제10회 선전 특선작 ‘정원’.


그러나 나혜석은 1930년 11월 김우영과 갈라서면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합니다. 유럽 체류 중이던 1927년, 천도교 도령 최린을 만나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생활고와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붓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1931년 선전에 출품한 ‘정원’이 다시 특선으로 뽑혀 재기하는 듯했습니다. 1935년에는 경성 진고개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열고 200여 점을 전시했는데 관객은 물론 미술계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 해 말 동아일보에 실린 화가 김용준의 ‘화단 1년의 동정’은 나혜석 개인전에 대해 ‘퍽 기대했지만 태작(駄作·서투르고 보잘 것 없는 작품)만 모은 것 같았다’고 짧게 비평할 정도였으니까요.

나혜석의 고향인 경기 수원시 ‘나혜석 거리’에 조성된 그의 좌상. 뒤쪽 석벽엔 그의 시 ‘인형의 가(家)’가 새겨져 있다.
나혜석의 고향인 경기 수원시 ‘나혜석 거리’에 조성된 그의 좌상. 뒤쪽 석벽엔 그의 시 ‘인형의 가(家)’가 새겨져 있다.


결국 나혜석은 불교에 귀의할 작정으로 오랜 벗 일엽 스님(김원주)이 있던 수덕사를 찾았지만 속세에 미련이 많았는지 이마저 포기하고 1948년 무연고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나혜석은 ‘도덕적으로 파멸한 신여성’으로 잊혀져갔지만,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1971년부터 월간 여성동아에 17회 연재한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계기로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의 고향인 경기 수원시에 조성된 ‘나혜석 거리’를 통해 영원히 살게 됐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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