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고려는 국교(國敎)로 불교를 숭상했다. 원광법사와 자장 원효 의상대사의 지도 아래 신라는 세속오계 정신을 화랑도 수련에 도입해 삼국통일의 큰 역할을 다하게 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힘입어 불교 법회가 활성화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 주관행사로 봉행했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 이의방 무신정권이 출현해 불교는 몰락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최충헌을 비롯한 최 씨 무신정권은 대몽항쟁(對蒙抗爭)과 팔만대장경 판각을 통해 고려를 지켜냈다. 백성은 많은 고초를 겪어 민생은 피폐해졌지만 당시 세계 최강 원(元)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조선왕조는 고려 후기 타락한 불교를 배척하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펴 불교는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러나 명종 때 보우대사와 문정왕후가 스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제도를 부활시켜 서산, 사명대사를 중용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며 활약했고 일본에 잡혀간 포로 500명을 데려오는 등 호국불교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숙종 15년(1689년) 어느 날 전라도 신안 앞바다 임자도에 중국에서 출발한 큰 상선이 난파해 좌초하자 사람들이 이 배에 실린 재물은 가져가고 불경(佛經)만 남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백암 성총(柏巖 性聰·1631~1700) 스님과 그 제자들이 달려가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 80권을 찾아냈다. 이들은 이후 전국을 돌며 탁발해 판각불사(板刻佛事)를 이뤄 목판 화엄경소초를 만들었다. 현재 서울 봉은사 판전에 모신 그것이다.
이 불사는 조선 불교가 산중에서 소원 성취 및 생일 불공과 천도재를 올리거나 각종 부역을 하며 명맥만 유지하던 데서 벗어나 ‘화엄경’의 원융화합(圓融和合) 사상을 사회에 전하는 큰 계기가 됐다.
조선시대 선지식 환성 지안(喚醒 志安·1664~1729)과 호암 체정(虎巖 體淨·1687~1748) 설파 상언(雪坡 尙彦·1707~1791)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인악 의첨(仁岳 義沾·1746~1796) 등은 화엄경의 대가로 손꼽힌다. 이들 모두 백암 화상의 ‘화엄경소초 판각불사’ 이후 두각을 나타냈다. 판각불사 이후 화엄경 연구 붐이 조성됐고 전국적으로 화엄대회 강회 등 화엄경대법회가 열렸다.
화엄경을 주제로 법문을 설하는 화엄대회는 당시 신분사회였음에도 법회 참석에 빈부귀천 남녀노소 제한을 두지 않는 무차(無遮)대법회로 열렸고 모든 참석자 그릇에 음식을 가득 담아주는 만발공양(滿鉢供養)을 펼쳤다. 대둔사의 청련 원철(靑蓮 圓徹)은 1607년 화엄대회를 최초로 열었다. 이어 풍담(楓潭)의 대둔사 대회, 1691년 백암의 선암사 창파각(滄波閣) 화엄대회, 호암(虎巖)의 대둔사 정진당(精進堂) 대화엄강회, 1760년 연담의 대둔사 대회와 1768년 미황사 대회 등이 이어졌다. 또 1719년 무용(無用), 1750년 영해(影海)의 송광사 화엄대회 등 140여 년간 화엄대가 20여 명이 전국에서 전통을 이은 것이다.
판각불사로 최상승 화엄불교가 주류를 이루게 돼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탈피해 일대변혁을 가져올 수 있었다. 조선불교가 다시 살아나 백성도 부처님의 자비구제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한 시대를 선도하는 불교의 힘이 삼국통일과 국가수호의 든든한 상징이 되고, 백성이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다. 고려 최 씨 무신정권의 대몽항쟁이나 조선 임진왜란 때의 승병 활약은 불교가 호국불교로서 훌륭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물론 불교집안에도 공부하기 싫고, 책 읽기 싫어하는 시대적 흐름이 있다. 올 4월 화엄경소초가 한글로 완역됐다. 화엄경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공부로 불교문화를 중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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