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종 前총리 유고회고록 ‘인생 회상’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때 학생-경찰 돌팔매 몸으로 막고
1992년 대선때 중립내각 맡아… 공정한 선거 치러내 자부심”
“과도적 상황을 조화롭게 수습하면서 발전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늘 나의 몫이었다.”
올 5월 별세한 춘재(春齋) 현승종 전 국무총리(1919∼2020)는 최근 나온 유고(遺稿) 회고록 ‘인생 회상’(여백)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고려대 학생처장으로 1960년 4·19혁명 전야의 4·18의거부터 1965년 한일협정반대운동까지의 격변기에 학생들을 진정시키려 한 일이나, 1974∼1980년 성균관대 총장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제2캠퍼스를 연 일이나, 1992년 10월부터 4개월여의 중립내각 국무총리로 그해 12월 대선을 공정하게 치러냈다는 평가를 받은 일 등을 볼 때 고인이 스스로를 “야구 경기에서 실점 위기에 등판하는 ‘소방수’라는 투수 역할이 나의 처지와 비슷했다”고 한 것은 겸양지덕이면서 적절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 같은 겸양지덕과 훌륭한 세이브 투수 역할의 바탕에는 ‘진(眞·진실함)’ ‘성(誠·정성스러움)’ ‘노(努·힘씀)’라는 그의 인생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음 사례들이 그렇다.
1960년 4·19혁명 하루 전날 학생들의 안전을 지키고 자칫 폐교 당할 염려도 없지 않다는 생각에 가두 진출을 만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국회의사당(현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연좌 시위하던 3000여 학생이 격앙되는 것을 막으려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한 학생도 자신에게 불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을 흐뭇하게 생각했다.
1962년 시위를 하다 연행된 학생 280여 명을 데리러 부평 경찰전문학교 강당에 도착해 “여러분 얼마나 고생했어요. 이 자리가 학교 교실이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라며 눈물을 흘리자 학생들도 울어 눈물바다를 이뤘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하던 학생들과 경찰들이 투석전을 벌이자 그는 ‘돌멩이를 맞더라도 내가 혼자서 맞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돌멩이가 날아드는 한복판으로 나가 섰다. 그러자 양방 모두 돌팔매를 그만뒀다.
그를 모셨던 김옥조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다른 사람이 했다면 ‘정치적 수사(修辭)’ 정도로 치부할 말도 이분이 했다면 진정이 담긴 말로 받아들여졌다”고 회고한다.
책에서는 그의 양심과 솔직함 또한 두드러진다.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일제의 학병 모집을 피해 다니다 최종 마감일인 1943년 11월 20일 결국 지원한 뒤 그는 자책한다. “죽음의 확률이 높은 징용을 면하기 위해 생명에 미련을 가지고 ‘지원’의 욕됨을 자초한 나 자신에 대한 죄”라고 토로한다. ‘또 다른’ 솔직함도 있다. 집에서 혼담이 오가자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아 배필이 될 사람을 보고 와서는 “다행히도 코는 비뚤어지지 않아 안심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군자인 양하지 않는다. ‘평안도 울뚝밸이(화를 벌컥 내며 말이나 행동을 우악스럽게 하는 사람)’ 성격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6·25전쟁 중 공군에 입대해 인사행정과장으로 있을 때 일이다. 미국 훈련을 보낼 조종사의 여권 발급 문제로 외무부에서 입씨름하다 거절되자 홧김에 현관문을 쾅 닫아 대형 유리를 깨뜨린 것.
잘 몰랐던 소소한 역사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사각모에 망토를 두르고 다닌 것으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되던 대학생은 없었다. 경성제대 예과생들이 둥근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둘렀다. 이들은 스톰(storm)이라는 특유의 춤을 전찻길을 막고 추기도 했다.
고인의 101년 삶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부터의 한국 근현대사와 일치한다. 지금 찬찬히 다시 읽어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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