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1월 11일 화성돈(華盛頓)회의가 개막했습니다. 화성돈은 미국 수도 워싱턴의 한자 표기죠. 9개국이 극동과 태평양문제를 협의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군비축소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에 집중해서 ‘워싱턴군축회의’라고 부르기도 했죠. 이 회의는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의 ‘시즌(Season) 2’ 성격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려고 미국이 주도했죠.
파리강화회의 때는 미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스타였습니다. 14개조 평화원칙을 제시했고 국제연맹 창설도 주창했죠.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의 반대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국제연맹은 의회의 반대로 정작 미국이 가입하지 못하고 말았죠. 윌슨의 후임자인 워런 하딩은 워싱턴회의에서 극동과 태평양의 긴장완화를 추진하려고 나섰습니다.
극동과 태평양이라고 했지만 최대의 문제 국가는 일본이었죠. 일본은 유럽 국가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영일동맹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산둥반도에서 독일군을 몰아낸 뒤 1915년 중국에 21개조를 들이밀었죠. 중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중국을 독차지하려는 일본에 맞서 미국은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앞세워 경제 진출을 노렸죠. 이 때문에 워싱턴회의는 당시 지구촌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포와(布哇), 즉 하와이 만국기자대회에 참석한 동아일보 조사부장 김동성의 눈길도 일찌감치 워싱턴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김동성은 만국기자대회에 갈 때부터 역사의 현장인 화성돈회의를 참관하려고 마음먹었죠. 미리 보고했다가는 총독부가 불허할 테니 몰래 가느라고 여비는 고향 개성에 얼마 남지 않은 논밭을 팔아 마련했다고 합니다. 만국기자대회가 끝나가던 10월 29일 김동성은 워싱턴을 향해 출발하죠. 무단으로 출장지를 이탈한 겁니다.
경성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여객선을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캐나다 빅토리아 항에 들른 뒤 미국 서부 시애틀 항에 발을 내디뎠죠. 여기서부터는 대륙횡단기차를 타고 워싱턴을 향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습니다. 하와이에서부터 13일이 걸려 8700㎞가 넘는 거리를 달려간 셈이죠. 도착한 날은 11월 11일, 회의가 개막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김동성은 출입증도 받지 못한 비공식 취재기자 신세였죠.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회의장 앞에서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스티븐 포터와 마주칩니다. 포터는 미 의원단이 조선을 방문하도록 주선할 때 만나 친한 사이였죠. 포터는 즉석에서 출입증을 만들도록 해 김동성은 공식 취재기자로 승격(?)됐습니다. 기자 53명이 몰려온 일본도 회의장 출입기자는 1명에 불과했죠. 일본 기자는 김동성을 보고는 ‘저 요보상(조선놈)은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라는 표정을 짓는 듯했답니다.
동아일보사는 김동성의 무단 출장 소식을 듣고 다시 중역회의를 열었습니다. 출장을 사후 승인하고 출장비 2000원을 추가 송금했죠. 김동성 한 명에게 총 4000원, 지금 5000만 원이 넘는 출장비가 나간 겁니다. 동아일보는 이미 화성돈회의와 관련한 엄청난 양의 사설과 기사로 지면을 채우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11월 11일 이후 그해 말까지 관련 사설만 23건 실었고 ‘화부회의의 연구’ 해설기사를 29회 내보낸 것이 대표적이죠.
김동성이 보내온 사진으로 환등을 만들어 강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슬라이드 쇼를 보여주며 최신 세계정세를 설명한 것이죠. 12월 17일 종로 청년회관에서 열었던 강연회에는 무려 1만 명이 몰려서 전차가 다니지 못하는 상황까지 빚어졌습니다. 3회 상연을 계획했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는 관객 때문에 자칫 사고가 날지도 몰라 2회로 중단하고 말았죠.
관객들은 세계 유명 정치인이나 언론인의 모습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김동성이나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 대표 정한경 박사의 얼굴이 나오자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와이의 조선 동포들이 손님들에게 꽃다발을 전해주거나 하와이에서 태어나 조선이 어디인 줄도 모르는 남녀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 장면에는 환호성과 함께 눈물을 훔치는 이들까지 있었죠.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모양입니다. 1921년 12월 19일 3면 기사는 이 광경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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