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찬 감독 “어둠의 일을 하는 남성캐릭터 계보 잇고 싶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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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찬 감독의 ‘누아르 사랑’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홍원찬 감독.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홍원찬 감독.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남자의 사투.’ 얼핏 들어도 비슷한 줄거리의 영화들이 뇌리를 스친다. 아내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남자가 걷잡을 수 없는 살인의 늪에 빠지는 ‘황해’(2010년), 인질로 잡힌 옆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다시 총을 잡는 전직 특수요원 이야기 ‘아저씨’(2010년) 등 한국 영화에서만도 두세 편은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 단골 소재다.

‘신세계’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황정민과 이정재의 재결합으로 화제를 모은 이 영화는 개봉 첫날인 5일 34만4000여 명이 찾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신세계’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황정민과 이정재의 재결합으로 화제를 모은 이 영화는 개봉 첫날인 5일 34만4000여 명이 찾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5일 개봉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역시 출발점은 같았다. 10년 전 ‘납치된 아이를 찾는 남자’라는 소재를 제작사 대표에게서 들은 홍원찬 감독은 바로 시나리오 집필에 들어갔다. 홍 감독은 캐릭터의 힘과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역동적인 액션으로 이 기시감 강한 소재를 정면 돌파했다. 인신매매 조직에 납치된 딸을 구하려는 살인청부업자 인남(황정민)과 그의 조력자 유이(박정민), 자신의 형을 살해한 인남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는 ‘백정’ 레이(이정재)의 삼각 추격전은 108분 동안 관객을 극한의 긴장상태로 몰아넣는다.

개봉 전날인 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홍 감독은 시나리오 최종본이 나온 지난해 1월까지 “소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며 입을 열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아저씨’가 개봉했다. 결말을 지금과 아예 반대로 한 시나리오도 썼을 정도로 고민하다가 캐릭터의 힘으로 돌파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기존 시나리오는 인남이 딸을 구하는 플롯이 중심이었는데 시나리오를 손보면서 레이가 인남을 쫓는 구조를 강화했다. 유이 역시 원래는 중반까지만 등장하는 캐릭터에서 엔딩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바꿨다.”

‘황해’ ‘추격자’ ‘나는 살인범이다’의 각색을 맡은 필모그래피가 입증하듯 누아르 장르를 가장 좋아하는 홍 감독에게 인남은 늘 그려보고 싶던 캐릭터다. 프랑스 누아르 영화의 클래식 ‘사무라이’의 알랭 들롱, ‘드라이브’의 라이언 고슬링같이 “어둠의 일을 하는 남성 캐릭터의 계보를 잇고 싶었다”는 것.

“인남 같은 캐릭터는 뿌리가 없다. 늘 쫓기고 있기에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인남의 일본 집이 한 신 나오는데 세간을 하나도 두지 않고 캐리어만 덩그러니 놓여 있도록 연출했다. ‘히트’에 나오는 로버트 드니로의 집에 가구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레이의 추격과 살인의 동력이 무엇인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불친절할 정도로 전사(前史)가 생략됐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악인이 더 공포스럽다’는 홍 감독의 계산에 이정재도 동감했다. 의도는 중요치 않은 ‘살인광’ 레이는 철창살 틈으로 칼을 쑤셔 넣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문지른 얼음을 씹어 먹는다. 시나리오에 없던 이정재의 애드리브다.

“전사가 없는 인물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레이와 정재 선배님이 생각하는 레이를 하나씩 맞춰가는 과정이었다. 첫 미팅에서 정재 선배님이 레이의 전사가 없으니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A4용지 한 장에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중 ‘뱀 같은 인간’이라는 묘사를 가장 좋아했다. 뱀 같은 레이의 표정과 눈빛을 정말 잘 살려줬다.”

영화 제목은 기독교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청부살인에 몸담은 인남이 누군가를 구하려 함으로써 자신이 짊어진 원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미다. 인남은 과연 악에서 구원받았을까. 홍 감독은 관객에게 판단을 돌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는 인남을 보며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라고 말한다. 인남도 자신을 추격하는 레이에게 ‘너 그러다 나한테 죽는다’고 경고한다. 인남과 레이는 어쩌면 자신들의 숙명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본인의 운명을 직감하지만 앞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봐 주셨으면 좋겠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감독#누아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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