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고 초대 조선총독에 오른 데라우치는 이듬해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조선인 학교의 교육연한을 단축하고, 우리말의 모국어 지위를 박탈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 ‘국어’는 일본어가 됐고, 우리말과 우리글은 ‘조선어·한문’이라는 이름으로 기타 과목 취급을 받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후 문화정치를 표방한 사이토 총독은 성난 민심을 달래려는 유화책의 하나로 조선인 학교에 한해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로 인정하는 등 조선교육령을 다소 수정했지만,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업시간은 일본어의 절반가량에 그쳤고, 조선어를 가르칠 때도 일본어를 쓰게 해 조선어 과목은 마치 외국어 시간 같았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임경재 최두선 이규방 권덕규 장지영 등 국어학자들은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를 발족합니다. 1908년 주시경 김정진 등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의 후신인 이 단체는 1931년 조선어학회, 광복 후 1949년에는 다시 한글학회로 바뀌어 오늘에 이릅니다.
창간 초기 연속 사설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을 폐지하라’를 통해 총독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했던 동아일보는 조선어연구회 설립 바로 다음날인 12월 4일자 1면 사설 ‘조선어연구회, 그 의의가 중대’를 게재해 조선민중의 관심과 기대를 당부했습니다. 총독부의 조선어 말살정책이 계속되면 한글은 물론 민족정신까지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해 조선어연구회에 적극적인 지지를 호소한 겁니다.
사설은 우선 국가와 민족의 행복은 정치가나 군사전략가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학자, 농부, 실업가 등의 꾸밈없고 수수한 노력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며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실 한 구석에서 조용히 출범한 조선어연구회의 장도를 축원합니다. 이어 조선의 학술, 시가문학, 종교, 예술, 정치, 도덕과 경제까지 모든 분야가 발달하려면 조선의 문법과 언어의 발전이 기초가 돼야 한다면서 조선어연구회는 비록 소박하게 출발했지만 조선 문화의 기초를 다지는 위대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조선어연구회는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말, 우리글을 지켜내기 위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8회갑(480년)이 되던 1926년에는 11월 4일(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해 영원히 기념하기로 합니다. 물론 당시에도 ‘한글’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널리 쓰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글을 처음 배울 때 친숙해진 ‘가갸거겨…’에서 따온 이름이었죠. 이 가갸날이라는 명칭은 2년 뒤인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바뀝니다.
가갸날, 또는 한글날의 구체적 날짜도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실록에 기록된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다’를 근거로 당시 음력 9월 말일인 29일로 정했습니다. 1931년에는 기념일을 양력으로 바꿔 날짜를 고정하자는 뜻에서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해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했는데, 1934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 10월 28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 서문의 ‘9월 상한(上澣·상순)에 썼다’는 기록에 따라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반포일로 보고 1945년부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로 한글날을 정한 겁니다.
조선어연구회는 한글 보급을 위해 교사와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강습회도 엽니다. 동아일보는 한글강습회를 상세히 보도하는 한편 창사 8주년을 앞둔 1928년 3월부터 대대적인 문맹퇴치운동을 벌입니다. 이 문맹퇴치운동과 1931년 시작한 ‘브나로드 운동’은 다음에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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