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75주년 광복절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분들이 피땀을 흘렸지만,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력투쟁을 벌여 일본군을 벌벌 떨게 했던 김경천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1888년 무관의 집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 때 일본에 유학한 김경천은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소위, 중위로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지만 조선인 장교들과 모임을 가지며 항상 조국의 앞날을 고민했습니다. 1919년 도쿄 유학생 2·8독립선언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병가를 내고 귀국한 뒤 3·1만세운동 직후 가족을 남겨두고 만주로 향합니다.
그는 무인답게 외교보다는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습니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약한 국력 때문이었고, 국력의 시작은 곧 군사력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합니다. 이때 일본육사 후배 지청천, 대한제국군 출신 신동천(신팔균)과 의기투합해 이름을 광서에서 하늘 천(天)자가 들어간 경천으로 바꾸죠. 어릴 적 이름은 현충이었고, 김응천으로도 불렸으니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만큼이나 이름도 많았습니다. 그가 ‘진짜 김일성’이라 하는 사학자들도 있습니다.
김경천은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1919년 말 러시아 땅을 밟은 뒤 삼림지대인 연해주 수찬(현 파르티잔스크)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조선인 촌락은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인 마적 떼의 노략질에 폐허가 되곤 했습니다. 김경천은 각 촌락에 격문을 보내 의용군을 모집한 뒤 밤낮으로 훈련시켜 불과 넉 달 만에 마적을 뿌리 뽑습니다.
이때부터 시베리아 일대에서는 ‘백마 탄 김 장군’의 명성이 드높았지만 그가 국내에 제대로 알려진 때는 1922년입니다. 당시 연해주에서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던 공민 나경석(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오빠)이 1월 19일자부터 1면에 6회 연재한 ‘노령(露領·러시아 영토) 견문기’를 통해섭니다. 나경석은 격변기 러시아의 정정(政情), 러시아인의 특성, 그곳에 조선 동포들의 사정 등을 그려내다 1월 23, 24일자에 ‘경천 김 장군’을 다룹니다.
1월 23일자 노령 견문기는 마적의 습격을 받은 수찬 조선인들의 참상을 ‘처자는 굶어죽고, 부모는 얼어 죽어… 탈주해 정거장 화물차에서 자고 길거리에서 밥 빌어먹는 조선인이 부지기수’라고 묘사했습니다. 이어 ‘김 장군은 200~300명의 의용군으로 수천의 마적을 물리친 뒤 군정을 실시했는데, 중국인과 러시아인들까지도 복종했다’고 김경천의 활약을 전했습니다.
김경천은 이후 수찬의병대를 조직해 본격적인 무력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러시아 적군(赤軍·볼셰비키 혁명군)과 연합해 일본군 및 러시아 백군(白軍)에 맞선 그는 1921년 10월 백군의 반격을 받아 사망설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지만 불사신처럼 재기해 일본군과 백군에 여러 차례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1922년 12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뒤 믿었던 러시아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뒤에도 김경천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3년 동아일보는 ‘재차 활동을 개시해 군사 모집’(1월 11일자), ‘김좌진의 조선독립단에서 활동’(3월 6일자), ‘무관학교 설립 계획’(4월 26일자), ‘조선에 들어와 관공서 폭발 도모’(5월 10일자) 등 김경천의 움직임을 추적 보도했습니다.
김경천은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200자 원고지 20장이 넘는 장문의 글 ‘빙설이 둘러싼 시베리아에서 홍백 전쟁한 실제 경험담’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소개한 자작시 ‘시베리아벌’에서 ‘흑룡강 물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라며 독립에의 의지를 다졌지만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간첩으로 몰려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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