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거장 요셉 보이스(1921~1986)는 이미 미술관뿐 아니라 대학 강단, 사회단체, 정당(녹색당) 등 곳곳을 누비며 삶 자체가 예술임을 보여주고 ‘20세기 다빈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르네상스’나 ‘모더니즘’ 같은 허영적 미의식에 얽매여 박제된 미술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의 현대미술가 김주영(72)의 예술은 흰 광목천 위에 찍힌 검은 발자국이다. 이 단순한 몸짓이 예술인 것은 그것이 그녀의 삶과 온 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보이스의 ‘펠트 수트’와 벨기에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의 ‘산책’ 그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삶과 한국의 역사,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버무린 한국 작가 김주영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다.
● 길 위에서 스스로 붓이 되다
2009년 동유럽 불가리아의 초원. 카라반과 임시 주거촌이 만들어진 ‘노마딕 빌리지’ 한 가운데서 김주영 작가가 흰 광목천을 펼쳤다. ‘노마딕 빌리지’는 ‘길 위에서 작업하다’는 콘셉트로 예술가들이 유럽 일원을 이동하며 함께 생활하고 작업하는 프로젝트다. 오스트리아 슈미에드(Schmiede) 재단 후원으로 이뤄진 프로젝트에 김주영 작가도 참여했다.
그는 빈 땅에 스스로 만든 흰 광목천 길 위로 검은 먹을 칠한 발자국을 찍어 나갔다. 길 끝에 도착한 곳은 ‘비밀 정원’. 작가가 노마딕 빌리지에 도착하고 열흘 동안 가꾼 불모의 땅이다. 조약돌로 50X100cm 구역을 경계 짓고 매일 물을 주었더니 신기하게도 풀이 돋아났다.
이 길 앞에 선 작가는 땅에 완전히 엎드린다. 그리고 양팔을 십자로 벌렸다 머리 위로 모으고 반쯤 일어나, 자연의 신에게 쌀 한줌을 바친다. 김주영 작가의 행위 예술 ‘쌀의 길’이다. 이렇게 흰 광목천을 펼치고, 손에는 흙이나 재를 담은 채 발자국을 찍으며, 땅 위에 엎드리며 제식을 올리는 행위는 김주영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러한 퍼포먼스가 어떻게 예술 행위가 되느냐는 것이다. 방점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수많은 맥락과 함의에 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작가의 ‘노마딕 프로젝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이 의식은 한국의 비극적 근대사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얽히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 문(門)의 이편과 저편
작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사주신 크레용과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유화와 누드모델을 처음 접하고, 대학원 연구조교와 강사 생활 시절엔 기하학적 그림과 검은색 모노크롬 작업을 했다. 일요일에는 ‘홍익일요화우회’ 일을 하며 풍경화도 그렸다.
이중섭의 주치의였던 정신건강의학과 박사 유석진 교수 밑에서 임상예술요법(예술 치료)을 연구하면서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 때 나온 모티프가 바로 ‘문’이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문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넘어가는 초현실적 상징이다. 1986년 파리로 이주한 후 박사논문으로도 이어졌던 이 모티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너무 불충분한 이 세상의 수많은 모순들을 생각하며 상상한 ‘저편의 세상’으로 통하는 문과 같다. 모든 문제가 풀어질 것 같은 그런 동경의 세계가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구운몽’의 꿈 속 개미굴 저편의 세계 혹은 무릉도원처럼. 나 스스로를 지탱하게 하는 내 몸 속 집 같은 곳이다.”
그가 말하는 ‘모순’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한반도는 물론 인간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이다. 또 하나는 미시적 관점에서 작가의 태생적 조건이 자아낸 역사의 모순이다.
● ‘신경 고모’ 이야기
그는 30대 초반부터 홍익공업전문대에서 강의를 시작하고, 1982년 당시 뉴욕에 있었던 환기재단 공모에서 입상할 정도로 인정받는 작가였다. 그런데 1986년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프랑스로 떠난다. 이 때부터 시작된 노마드(유랑)의 삶은 프랑스에서 독일 인도 네팔 몽골과 한국의 DMZ, 다시 중앙아시아와 터키로 수십 년간 이어졌다.
유랑이 시작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내 진짜 이름은 김주영이 아니다”라고 털어놨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좌익 활동을 하다 증발했다는 걸 성인이 되어서 알았다. 어머니의 철저한 증거인멸로 나는 그 존재조차 몰랐다. 어릴 때 어머니가 나에게 크레용을 쥐어 준 것은 우리 가족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 본명이 ‘현선영’임을 알게 된 것이 파리행 즈음이다.”
존재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 그가 겪었던 지진과 같은 모순은 사실 분단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도 맞닿아 있다. 이 모순과 고통을 때로는 깊이 파고들고, 또 때로는 주변과 세계로 확장하며 김주영의 작품은 이어졌다.
2000년 남대문시장과 DMZ로 이어진 작업 ‘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이여: 등잔불 祭’와 2010년 노마드 프로젝트 ‘송화강은 흐른다: 신경 고모’는 작가의 개인사와 연결된다.
DMZ 프로젝트 당시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름 없이 벌판에 버려졌던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찾아보고 싶다. 체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소멸될 수 없는 끈질긴 생명의 투쟁을 담겠다”고 밝혔다. 작가는 DMZ를 따라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곳에서 호롱불을 켜고 제식을 올리며 남은 재를 상자에 담았다.
‘송화강은 흐른다: 신경 고모’에서는 중국 신경에서 남편을 만난 엄마, ‘신경 고모’(친척들이 작가의 어머니를 부르던 호칭)의 이야기를 추적해갔다. 하얼빈 장춘 길림으로 이어진 여정에서 그는 731부대 박물관, 의열단 결성 장소, 송화강 등을 찾아 무명의 영혼을 위한 제식을 올린다. 돌아온 뒤에는 자개장농 속에 어머니의 유품과 데드마스크를 놓고 에폭시로 굳혀 박제했다.
● 쌀과 흙과 한줌의 재
1986년 작가는 삶의 풀리지 않는 모순을 안고 프랑스로 떠난다. 그 곳에서 몇 번의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는데, 그 중 하나가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 여사(1916~2004)였다. 4년 전 환기재단 공모에서 수상한 젊은 작가를 김향안은 기억했다. 그리고 파리8대학에 진학한 김주영에게 장학금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때로는 불법 점거(squat)한 건물을 화실 삼았던 그에게 큰 도움이었다.
또 다른 만남은 노마디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였다. 막 파리에 도착해 프랑스어도 유창하지 못했던 김주영은, 들뢰즈의 강의실 앞에 기다리다 그에게 강의를 듣게 해달라고 졸랐다. 동양인 예술가의 절박함을 본 들뢰즈는 호의를 베풀었고, 김주영은 그의 강의를 청강했다.
이 때 그의 작품은 평면에서 공간으로 확장된다. 주어진 공간에 흰 천을 깔고, 검은 발자국을 찍으면서 충돌 속에 그는 조형 이미지를 건진다. 또 납작한 바닥에 거울을 놓아 깊이를 만들기도, 나무로 지은 기하학적 조형물 속에 초록색 네온사인을 넣어 활기를 불어 넣는다. 이 모든 것은 고정된 형식이 아닌 주변 맥락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리좀’(Rhizome)적 조형언어다.
유럽 지성사의 변화를 체화한 작가가 돌아온 것은 우리 농가의 처연한 삶이었다. 흙과 쌀과 농기구와 나무를 활용한 조형 언어를 그는 ‘애잔한 서정의 풍경’이라고 말한다.
“실컷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이 짓 저 짓 해보았는데, 원점으로 돌아왔다. 결국 나의 원점은 한국의 시골 논밭이 있는 전원이었다. 거친 잡풀더미와 뙤약볕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말이다.”
지난해에도 터키로 노마드 프로젝트를 이어간 김주영의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늘 끊임없이 이야기(내러티브)를 만들고, 집을 지으며 또 종국에는 그 집을 불태우고 재로 돌아갈 것이다. 흰 광목천에 찍힌 검은 발자국처럼, 우리의 삶도 결국은 타고 남는 ‘한줌의 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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