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붉은 카펫과 꽃,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화려한 풍경이다. 그런데 가까이 보면 나뭇잎 대신 돈이 매달려 있고, 벌거벗은 여인은 망치로 손을 내리친다. 칼이 널브러져 있고, 유혈이 낭자한 잔혹 정원. 화려함을 보고 달려든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이 그림은 박재철 작가(52·사진)의 ‘붉은 카펫’이다.
그림의 한가운데엔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혼부부가 보인다. 얼굴은 화면 밖으로 잘렸다. 결혼식의 기억은 저편으로 밀려나고 회색 남녀는 피를 흘린다. 2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결혼한 남녀가 갈라지는 과정”이라고 했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 더플럭스에서 열리는 박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 ‘붉은 카펫―가족 공동체의 욕망’이다. ‘붉은 카펫’을 이야기하기 전에, 작가는 화면 아래 빼곡히 놓인 책과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넣은 그림, ‘봄은 아프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가난한 시골에서 다섯 명의 누나를 둔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이란 이유로 누나들은 전부 초등학교만 다니고 내 학비를 벌었다.”
그림을 잘 그렸던 막내는 홍익대 동양화과에 진학한다. 1999년 첫 개인전을 열고 주목도 받았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해 성공해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는 가족의 압박이 채무처럼 돌아왔다. 숨 막힐 듯한 가족 관계가 죽을 것같이 힘들어 끊었다. 살을 잘라내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작가 생활도 계속할 수 없었다.
“도피하듯 결혼을 했다. 아파트단지의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뿌리도 가지도 잘린 채 인간을 위해 꽃을 피우라고 심어진 나무가, 자신의 욕망은 거세된 채 가족의 욕망을 짊어진 인간으로 보였다.”
개인의 욕망을 배제한 관계가 가능할까? 가부장제 사회가 강요한 틀이란 과연 온당한 것인가? ‘사는 것이 지옥 같았다’던 작가는 2015년 다시 붓을 잡았다.
“그땐 3년 안에 죽을 것 같았다. 이왕 죽을 거라면 내 얘기를 해보고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의 고통을 파고들며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중이다.
“사람은 욕망 없이는 살 수 없지 않나. 어쩌면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순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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