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 경성의 낙원동 재동 이곳저곳에 목조 2층집이 많았답니다. 어느 기다란 2층집에는 나무간판이 죽 내걸려 있었다죠. 북풍회 서울청년회 등이라고 새겨진 나무간판은 비바람에 주름살이 잡혀 있었답니다.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들이었죠. 국내에서는 1920년 조선노동대회가 출범해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위한 싸움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4년 뒤 경성노동회로 간판을 바꿔 달죠. 같은 해 일본에서 북성회로 출발한 조직은 1922년 남선노동동맹으로, 이후 북풍회로 변신했습니다. 서울청년회는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한 조선청년회연합에서 떨어져 나왔죠. 1922년 4월의 일입니다.
해외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18년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창립됐습니다.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단체로 꼽히죠. 위원장은 이동휘였고요. 한인사회당 일부 지도자들은 적위대를 구성해 러시아의 극동 소비에트 정부 편에서 백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동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온 뒤에도 사회주의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여기에 여운형 신채호 김두봉 등이 참여했죠.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전신인 셈입니다. 1920년 초의 일이었죠.
이처럼 1920년대 초에는 안팎에서 붉은 물결이 넘실댔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머리가 무거웠죠. 동아일보 1922년 2월 18일자 1면 사설 ‘사회주의적 운동에 대하여’는 이런 고민을 다룬 논평이었습니다. 사설은 시베리아와 만주 상하이의 동포사회에서 공산주의가 퍼져 비밀회의를 열고 비밀계획을 세워 장래 운명을 개척하는 모양이라고 소개합니다. 지금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때는 해외 동포사회의 동향을 정확하게 취재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단언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사회주의 움직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며 장차 큰 세력을 이룰 것으로 내다봤죠.
그 이유는 먼저 조선인의 70, 80%를 차지하는 소작인들의 생활이 참담한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생활을 개선하려면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1년 소출을 오롯이 가져갈 수 있게 해야 했죠. 소작인들이 각성하면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사회주의적 의식이 당연히 생길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상공업에서도 자유방임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승열패가 진행돼 자본가는 갈수록 잘 살고 노동자는 점점 못사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봤죠. 소규모 자본을 가진 조선인은 노동자로 전락하고 결국 조선인은 모두 노동자가 돼 일본인 자본가에 맞서게 된다고 예상했습니다. 이러면 사회적 생산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는 분석이었죠.
세계 흐름을 보더라도 노동자가 보통선거와 노동조합, 공장관리, 국가지배 등을 거쳐 힘을 갈수록 키울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붉은 색을 가까이 하면 빨개진다는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는 말도 현실이 될 판이었죠.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한 러시아가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요. 러시아는 코민테른을 세워 혁명 수출에까지 나서는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민족자결이라는 솔깃한 말도 하고 혁명자금도 대주었습니다. 이래서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먼저 자본주의체제를 타도한 뒤 독립을 되찾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렇지만 사설은 무작정 사회주의 파도에 방파제를 쌓자고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할 일은 사회주의의 핵심과 정신을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라고 했죠. 사회주의에 취약한 위치에 있는 조선인이 살아남는 길은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최선의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판단은 이후 동아일보 지면에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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