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 10달간 85차례 모금 강연…해외동포 보듬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9일 11시 40분


코멘트

1922년 2월 27일



플래시백
나라 잃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가 집중호우에 큰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을 구호하며 사실상 정부 역할을 했다는 얘기는 이 ‘동아플래시100 코너’에서 ‘도와줄 정부 없는데 하늘마저…동포 구호 나서다’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도움이 절실한 동포는 국내뿐 아니라 만주와 간도, 러시아, 일본, 멀리 하와이에도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조선인 집단거주지 ‘신한촌’의 전경. 1920년 일본군이 무차별 살상을 자행한 ‘4월 참변’의 무대가 된 아픔을 안고 있다.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조선인 집단거주지 ‘신한촌’의 전경. 1920년 일본군이 무차별 살상을 자행한 ‘4월 참변’의 무대가 된 아픔을 안고 있다.
일제의 학정과 굶주림에 대대손손 정붙이고 살던 고향을 등진 해외동포는 당시 만주 200만, 시베리아 100만, 일본 40만,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 수만 명 등 이미 수백 만 명에 달했습니다. 떠날 때야 어딜 가도 여기보단 낫겠지 싶었지만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가진 것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뿌리 내리기도 힘들었지만 총칼에 희생되기 일쑤였습니다. 시베리아에선 정변(政變)에 시달린 것도 모자라 툭하면 마적 떼의 표적이 됐고, 만주에선 일본군이 일으킨 ‘훈춘 사건’에 무차별 학살당하기도 했죠.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북간도 용정의 대성학교(위)와 동흥학교. 동아일보는 재외동포 위문회 사업을 통해 모은 돈으로 1924년 대성학교에 1000원, 동흥학교에 2000원을 각각 보냈다.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북간도 용정의 대성학교(위)와 동흥학교. 동아일보는 재외동포 위문회 사업을 통해 모은 돈으로 1924년 대성학교에 1000원, 동흥학교에 2000원을 각각 보냈다.
국내라고 사정이 좋을 리 없어 동아일보는 안팎으로 힘든 이 상황을 ‘안에 있는 동포는 계모 슬하에 자라나는 아이 같고, 재외동포는 부모 없는 아이가 천대를 받으며 눈물을 삼키고 살아가는 것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한반도에 있으나 외지에 있으나 나도 조선인, 너도 조선인이라는 ‘조선인 의식’을 발휘해 이들 해외동포의 손을 잡아주자고 호소했습니다. 그 시작이 1922년 2월 27일자 1면에 사고(社告)로 실린 ‘재외동포 위문회’입니다.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십시일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전국순회 유료 강연회를 준비했습니다. 김동성 조사부장이 직접 참가한 1921년 10월 하와이 만국기자대회와 11월 워싱턴 군축회의의 ‘따끈따끈한’ 사진과 해외동포의 활약상을 담은 사진을 필름으로 만들어 틀어주고 장덕수 주필과 김 부장 등이 강연을 했습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도쿄의 한 수용소에 수용된 조선 동포들. 동아일보는 당시 편집국장 이상협을 급파해 자세한 보도를 하게 하는 한편 재외동포 위문회 성금 가운데 2500원을 현지 동포들에게 전달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도쿄의 한 수용소에 수용된 조선 동포들. 동아일보는 당시 편집국장 이상협을 급파해 자세한 보도를 하게 하는 한편 재외동포 위문회 성금 가운데 2500원을 현지 동포들에게 전달했다.
강연회 입장료는 갑 1원, 을 50전, 학생 30전이었습니다. 1922년 당시 1원은 쌀값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가치로 약 1만 원이니 썩 부담 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에 더해 3원 이상을 내면 재외동포 위문회 회원으로 인정하고 지면에 성명과 금액을 일일이 싣기로 하고 희사금을 모았습니다. 3월 6일 신의주를 출발해 12월 23일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85차례 개최한 강연회에는 연인원 6만여 명이 몰렸고, 회원가입은 약 5000명을 헤아려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동아일보도 500원을 냈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이 총 3만8696원 85전. 희사금 비중이 60.5%로 가장 컸고, 입장료가 30.5%, 나머지는 이자수입과 잡수입이었죠. 이 가운데 7443원 35전을 순회강연회 경비로, 3원 50전을 북간도 용정의 영신여학교에 연필을 사 보내는데 각각 썼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이 3만1250원. 현재가치로 대략 3억 원쯤이었던 셈입니다. 어떤가요? 많다면 많은 돈이지만 수백만 해외동포에게 골고루 나눠주기엔 역부족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런데도 정치깡패 박춘금을 앞세운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은 육혈포를 겨누며 위문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물론 동아일보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1923년 7월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동포 학생단 20여 명이 두 달 동안의 일정을 마치고 9월 1일 경성역에서 송별하러 나온 친지 등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하와이 한인기독학교에도 재외동포 위문금 2500원을 보냈다.
1923년 7월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동포 학생단 20여 명이 두 달 동안의 일정을 마치고 9월 1일 경성역에서 송별하러 나온 친지 등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하와이 한인기독학교에도 재외동포 위문금 2500원을 보냈다.
당초 동아일보는 해외 각지를 방방곡곡 다니며 동포들을 만나 ‘물품’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자칫하면 민중의 혈성(血誠)을 순회위문 여비로 다 날릴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쓰고 나면 없어져버릴 물품보다 영원히 남는 사업에 쓰기로 하고 해외동포가 장래 무궁한 발전의 길을 닦고 새 생명을 창조하는 교육기관에 기부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습니다. 동아일보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제의 흉계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일본 동포들에게 2500원의 위문 금품을 전달한 것을 제외한 전액을 1924년 북간도 용정의 동흥학교 등 22곳에 나눠 보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