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청년 임동식(72)은 ‘한국미술청년작가회’ 소속 작가들과 함께 캠핑을 떠났다. 충남 태안군 안면도 꽃지해변에서 며칠 머물며 그들은 바다와 땅, 하늘을 캔버스 삼아 작품 활동을 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충청도 중심의 지역 미술을 태동시킨 순간이었다. 이후 임 작가는 1980년대 홍명섭을 비롯한 지역 작가와 함께 ‘야투(野投)―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결성하고 자연미술(표현 대상이 아니라 자연이 미술 안에서 직접 작용하는 예술)을 한국에 유입했다.
40년이 지나 제5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가 된 임 작가를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온 국민이 사랑하는 박수근 화백의 이름을 딴 상을 받으니 주변에서 정말 많은 연락을 받았다”고 기뻐했다. ―자연미술이 시작된 순간이 궁금하다.
“1975년 꽃지해변에서 전국광 작가는 할배바위에 수평선을 그리고, 나는 일정한 크기의 석고로 된 알을 만들어 해변에 깔았다. 파도소리와 바다의 수평선, 하늘이 어우러지는 모양에서 밀려오는 감동이 있었다. 이때 자연미술의 가능성을 처음 봤다.”
―‘야투’는 어떻게 결성했나.
“1980년 공주로 내려와 대전의 홍명섭 류근영 등과 의기투합해 ‘금강현대미술제’를 열었다. 당시 모인 사람들은 저를 비롯해 모두 유명하지는 않지만 뭔가 하고자 하는 열망에 차 있었다. 홍명섭 선생이 ‘현장’이라는 말을 붙이고, 세미나도 열며 야투가 시작됐다. 야투는 농구 용어에서 차용했다. ‘내가 들로 무언가를 던지다’와 ‘들에서 나에게로 뭔가 던져 온다’는 뜻이다.”
―당시 미술계 상황은 어땠나.
“서울시에서 짓고 있던 미술아카이브가 (미술품) 수집의 기점을 1970년으로 잡았다. 이때부터 한국 현대미술이 ‘국전파(國展派)’ 대 ‘반(反)국전파’ 구도를 벗어나 다원화했다고 본다. 나 역시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인 길목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을 많이 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로 유학을 갔다.
“카셀도쿠멘타(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전)가 한창 주목받고 신표현주의 운동이 독일 미술에 대두되는 시점이었다. 나는 오히려 유럽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각국의 민속미술에 관심이 갔다. 문화권마다 다른 미술의 양상을 비교하며 생각하는 기회였다.”
―박수근미술상 심사평 중에 ‘수상 전시를 통해 본격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줬으면’ 하는 의견이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아카이브 자료와 관련된 내용이어서 포함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1970년대부터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일반적 풍경화부터 농사와 관련된 유화, 가족애 등을 담은 드로잉이 있다. 회화와 드로잉, 그 자체를 보여주는 전시를 구상 중이다.”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정하려고 하나.
“박수근 화백의 휴머니즘처럼 나와 내 가족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을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 아버님이 편찮으신 것을 비롯해 개인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아픈 형제의 조카를 어머니가 돌보는 모습이나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담은 드로잉이 있다. 예술과 마을에 관계된 ‘원골 시리즈’나 농촌을 비롯해 그동안 그려온 고목 그림을 한자리에 모으고도 싶다.”
―앞으로 더욱 바빠지겠다.
“신작과 병행해 다양한 내용의 활동을 펼치고 싶다. 박수근 화백을 비롯해 한국 미술사에 남은 훌륭한 작가들의 예술 행보에서 받은 감동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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