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미술품 돌려주라” 유족 승소… 기념사업회는 인수 절차 준비중
미술관과 작품 등 700점 기증 합의
대부업체 수장고에 담보로 잡혀 있는 사실이 알려져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던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작품이 마침내 안식처를 찾은 것으로 6일 확인됐다. 수백 점에 달하는 작품들의 보금자리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서울시립미술관은 권진규의 작품과 기록 700여 점 기증에 합의하고 구체적 절차를 논의 중이다. 작가 사후 40여 년간 제자리를 찾지 못해 안타까움을 샀던 작품들이 시민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공의 자산이 되는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20세기 대표적인 조각가인 권진규는 일본 무사시노미술대에서 앙투안 부르델의 제자 시미즈 다카시에게 조각을 배웠다. 그의 작품은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미술 교과서에도 수록됐으며 2009년에는 개교 80주년을 맞은 무사시노대가 권진규를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로 선정했다.
○ 비운의 작품, 시민의 품으로
서울시립미술관과 권진규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말 북서울미술관의 ‘근현대명화전’을 계기로 작품 기증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회화와 조각 작품을 선보인 전시로, 권진규의 작품도 포함됐다.
당시 유족 측은 작품을 되찾아 오기 위해 대일광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유족은 옥광산 업체인 대일광업에 독립된 권진규미술관을 짓겠다는 약속을 받고 작품들을 넘겨줬지만 알고 보니 미술관은 짓지 않고 외려 작품을 담보로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다. 유족은 소송을 냈고 법정 공방 끝에 춘천지법 민사2부(부장판사 장두봉)는 지난달 15일 대일광업 측에 “미술품을 돌려주라”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에서 이긴 유족 대표는 내년 3월까지 작품을 인도해올 수 있도록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는 이들 작품과 기록을 2021년 12월 종로구 평창동에 개관 예정인 ‘서울시립 미술 아카이브’와 연계해 보존·연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단순한 작품의 보관과 전시를 넘어 지속적인 연구로 시대적 맥락에 맞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아카이브 미술관’의 취지와도 맞아떨어진다.
○ “중요 작가 체계적 조명 가능”
전문가들은 이번 기증이 잘 마무리되면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허유림 RP인스티튜트서울 대표는 “예술 작품은 상품이기 이전에 사회와 시대를 담는 공공자산”이라며 “단순한 수집이나 과시를 넘어 연구를 통해 공익적 가치를 보여준다면 의미 있는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유럽이나 미국의 지역 공공 미술관도 기증으로 소장품을 구성해 좋은 작품을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마르셀 뒤샹의 작품 다수를 소장한 아렌스버그 부부의 기증으로 전 세계 뒤샹 팬이 모여드는 ‘성지’가 됐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항구 도시인 애버딘은 인구 20만 명이 조금 넘지만 ‘애버딘 미술관’은 모네, 르누아르, 툴루즈로트레크 등 알찬 인상파 컬렉션을 자랑한다. 지역 광산 사업가인 알렉산더 맥도널드의 기증 덕분이다.
이에 비해 국내 미술계에서는 작품 수집은 물론이고 ‘큰손’들이 소장품 공개도 꺼리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기증은 작가 사후 작품 관리가 어려워진 유족에 의해 이뤄졌다. 이마저도 큐레이터나 관장 없이 미술관만 개관하는 등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잡음이 일기도 했다. 유족은 작품을 공공 자산으로 인식하고, 미술관은 그에 맞는 예우를 갖춰주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던 이유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권진규 작품은 그동안 수장고에 갇혀 있어 제대로 된 재조명과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며 “한 작가를 조명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규모의 작품들이 필요한데,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이자 드문 조각가인 권진규를 체계적으로 볼 근거가 마련된 것이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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