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4월 초 경성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가 열렸습니다. 연합회는 1920년 12월 출범해 만으로 1년을 조금 넘은 신생 청년조직이었죠. 그런데 이 총회에서 파란이 일어납니다. 지역청년회의 하나인 서울청년회가 임원을 바꾸라고 요구한 것이죠. 서울청년회는 임원을 다시 뽑지 않으면 연합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엄포까지 놓았습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진짜 탈퇴해 버렸죠. 1922년 4월 6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서울청년 탈퇴 신위원 선거’ 1단짜리 기사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 짧은 기사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굵직한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서울청년회가 바꾸라고 요구한 임원은 장덕수 김명식 오상근 등이었죠. 장덕수는 당시 동아일보 주필 겸 부사장이었고 김명식은 2개월 전까지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동아일보 논설반에서 한솥밥을 먹었다는 점 말고도 더 있었죠. 일본 와세다대학 동문이었고 유학시절 중 일제를 타파할 목적의 비밀단체 ‘신아동맹단’에 함께 참여했으며 조선에 돌아와선 반일 비밀단체 ‘사회혁명당’의 중심인물로 활동했습니다.
사회혁명당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중국 상하이에서 세운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에 대표를 보내면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로 변모합니다. 장덕수 김명식은 국내부 간부가 됐죠. 사회혁명당과 고려공산당은 사회주의 단체였지만 장덕수는 실력양성과 문화운동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김명식은 점차 사회주의자로 바뀌어갔고요. 이 사이 서울청년회는 김사국 신백우 같은 신흥 사회주의 세력이 장악했습니다.
신흥 세력이 보기에 장덕수 김명식 등은 ‘얼치기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문화운동으로 사회를 개량하는 사회주의자가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었죠. 김윤식 사회장 반대도 신흥 세력이 활용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사기 공산당’이라는 말까지 들먹이며 공격의 고삐를 죄었죠. 러시아가 보내준 거액의 ‘레닌 자금’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이 독식했고 일부를 받은 국내부가 워싱턴군축회의 대표 파견비와 유흥비 등으로 써버렸다며 이는 사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신흥 세력은 서울청년회를 접수한 뒤 조선청년회연합회도 장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시도가 실패해 서울청년회가 탈퇴하면서 장덕수 김명식도 연합회 임원에서 탈락했습니다. 서울청년회 간부였던 장덕수 김명식이 탈퇴한 상급단체인 연합회 임원을 맡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신흥 세력은 2개월 뒤 서울청년회에서 장덕수 김명식 등을 제명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이후 서울청년회는 사회주의의 길로 달려갔죠.
이 분열사태의 영향은 심각했습니다. 먼저 청년운동의 중심인 조선청년회연합회가 크게 약화되고 말았죠. 1922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 2주년 기념식을 맞은 집행위원 김철수의 말입니다. “2, 3년 이래로 각지에 청년단체가 일어나서 처음에는 기세 매우 왕성하여 한때는 600여 곳이나 되더니 지금은 400곳 이내이고 모두 활동을 정지해 명의만 남은 형편이올시다.” 사회주의 세력의 강화가 연합회 약화라는 반작용을 몰고 온 한 원인이었던 셈이죠.
장덕수와 김명식의 앞날에도 큰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장덕수는 레닌 자금을 멋대로 썼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과격 사회주의자로부터 목숨까지 위협받는 처지가 되죠. 결국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고 사회주의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김명식은 레닌 자금으로 세운 신생활사의 주필로 옮겨 잡지 ‘신생활’을 펴냅니다. 하지만 김명식은 잡지를 통해 적화사상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머지않아 일제 경찰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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