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858~1936)는 일본 해군의 실력자였습니다. 해군사관학교 격인 해군병학료(兵學寮)를 나와 흔치 않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죠. 해군대신의 딸과 결혼해 든든한 배경도 생겼습니다. 승승장구한 끝에 1906년부터 8년 동안 해군대신을 지냈고, 러일전쟁 승전 공로로 남작 작위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14년 독일 지멘스사와 거래하면서 뒷돈을 받았다는 의혹에 휘말려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야인 생활을 하며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1919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3·1운동에 대한 과잉 유혈진압으로 조선의 민심이 들끓자 일본정부가 하세가와 총독을 해임하고 사이토에게 손을 내민 겁니다. 몇 차례 고사했더니 수상까지 찾아와 간청했습니다. 도대체 그가 낙점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 육군 출신인 데라우치, 하세가와 전 총독이 무리하게 총칼을 휘두른 바람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반작용으로 ‘육군이 아닌, 무관 같지 않은 무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사이토가 적임으로 떠오른 겁니다.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임 총독들과 차별화를 꾀했습니다. 우선 폭정의 상징인 금테 두른 관복을 없애고, 자신도 실천했습니다. 현역 해군대장으로 복귀했지만 강우규 의사의 폭탄세례를 받은 부임길부터 그는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죠. 동아일보를 비롯한 3개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고,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꿨습니다. 조선에도 일본과 같은 법령과 정책을 시행한다는 ‘내지연장주의’를 표방해 교육차별을 완화하는 신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전국 13개 도 가운데 5곳은 조선인을 도지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항일독립운동의 불씨를 잠재우려는 기만적 술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이토의 속임수를 하나하나 폭로하던 동아일보는 창간 2주년 기념호인 1922년 4월 1일자에 사이토 비판의 종합판을 실었습니다. 3면의 대부분을 할애한 장문의 논설 ‘공개장-재등실 군(君)에게 여(與)함’이 그것입니다. 기사는 자질구레한 것 빼고도 사이토가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이유로 8가지를 열거했습니다. △실패한 내지연장주의 신봉 △무단정치와 똑같은 허울 좋은 문화정치 △언론 출판 집회에 대한 압박 △해롭고 쓸모없는 중추원 존치 △냉담, 무성의로 일관한 조선인 교육정책 △일본인 본위 산업정책 △경찰의 확장 △유명무실한 지방자치와 조선인 관리 임용이 그것입니다. 특히 무단정치의 근본은 그대로 두고 겉만 고친 문화정치에 대해서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은 세상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만하지 못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기사는 이어 사이토에게 ‘군이 총독을 맡은 것은 해군 부패사건(지멘스 독직사건)의 치명상으로부터 부활하려던 것이었는데, 외형상 조선의 소란을 진정시킨 공을 세웠으니 오늘이라도 몸을 빼 동쪽(일본)으로 돌아감이 몸을 보존할 현명한 계책’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점잖게 권했지만 당장 물러나라고 요구한 것이었죠. 편집국장 이상협이 쓴 이 기사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이 30만 대군을 끌고 쳐들어온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 조롱했다는 ‘…전승의 공 이미 높으니 이제 만족하고 그치길 바라오’라는 시를 다시 보는 듯합니다.
신문을 검열하던 총독부 당국은 깜짝 놀라 이 기사가 조선통치를 부인하는 내용이며, 배일사상 배일운동을 선전 고취하는 내용이라며 압수조치를 내렸습니다. 압수를 당하면 대개 문제 된 기사를 들어내고 호외를 발행해 늦게라도 배달하곤 했지만, 띄어쓰기나 줄 바꿈도 안 한 원문 기준으로 200자 원고지 35장에 이르는 기사를 삭제하자니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는 할 수 없이 윤전기에서 한 번에 찍어내는 3~6면을 통째로 내리고 일부 지방에 1, 2, 7, 8면만 담은 슬픈 창간 기념호를 배달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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