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5m, 세로 2m에 달하는 이 대작은 황재형 작가(68)의 작품 ‘백두대간’이다. 작가는 이 그림을 1993년 시작해 수십 년에 걸쳐 그리고 있다. 단순히 보기 좋은 풍경을 감상하려는 그림이라면 오랜 세월을 들일 필요가 없다. 우뚝 솟아 굽이치는 산맥의 힘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사를 두터운 물감에 담은 그림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몸속에도 장엄한 백두대간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세상은 황재형을 태백과 탄광촌의 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산은 산이 아니고, 광부도 광부가 아니다. 단순한 기록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현대미술의 문을 연 화가 폴 세잔(1839~1906)의 ‘생 빅투아르 산’이 ‘개별성의 산’이라면, 황재형의 산은 ‘한국인의 땀과 살과 주름’에서 배어 나온 산이다.
○ 시대의 민낯을 찾아가다.
1982년 9월 작가는 가족과 함께 강원도 태백 탄광촌으로 이주했다. 안경을 쓰면 광부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콘택트렌즈를 끼고 일을 했다.
화가 황재형을 세상에 알린 것도 이 작품이다. 태백 황지탄광에서 갱도 매몰 사고로 사망한 광부 김봉춘 씨의 작업복을 극도로 확대했다. 낡아서 헤어지고 구멍 난 옷 그림자 아래 김 씨의 증명사진 속 얼굴이 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렇게 썼다.
“광부의 아내가 라면을 끓여 내온 밥상 틈에 박힌 고춧가루와 흰 밥알을 보며 남보다 더 고생하며 살았다 자부한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 그 잠시의 경험으로 작품을 시도했지만 광부의 작업복을 통해서는 광부의 작업복 밖에 표현할 수 없음에 남들이 보지 않는 변소에서 눈물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샘터, 1985년 3월호)
렌즈를 끼고 일하다 시력을 잃을 뻔하는 등 이어진 삶이 강렬해 그의 작품을 ‘탄광 노동자의 현실 고발’로만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가 탄광을 전전한 이유는 도시를 비롯한 각종 포장을 벗겨낸 시대의 민낯을 보기 위해서였다. 탄광촌에 왜 갔냐는 물음에 대해 황재형은 ‘진정성을 찾고 싶어서’라고 했다.
“1980년대 사회나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너무 깊었다. 진정성, 진실을 알고 싶었지만 그것은 누가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선 밤낮 술만 먹으며 세상 뒤집어지는 이야길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4.19 세대들의 변절도 봤다. 가장 뜨거운 진실은 현장에 있다니 그것을 찾겠다고 직접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이다.”
황재형은 현대 사회 인간의 노동이 놓인 조건, 그 민낯을 보기 위해 온갖 포장을 벗겨낸 벌거벗은 막장으로 향했다.
“광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치스런 감상은 무너졌다. 구경하며 짬짬이 한 일과는 전혀 다른 작업량. 갈증, 호흡 곤란, 작업 장소에서 부적당한 큰 키. 내게 중요한 첫 경험은 점심 시간에 이루어졌다. 부옇게 탄진이 날리는 갱도에서 버려진 갱목을 놓고 안전등을 서로에게 비추며 앉아 먹었던 점심은 삶의 연민과 진실이었다.” (샘터, 1985년 3월호)
이 과정에서 경계했던 것은 ‘대상화’, 광부의 삶을 그림의 소재로 이용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광부로 일하던 어느 날 황재형은 탄광 옆 판자 건물 속 목욕하는 선탄부들의 소리를 듣는다. 땀 흘려 일하고 난 ‘숭고한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 문고리를 붙잡았다. 수십 분을 고민했지만, ‘황재형, 너 지금 이 사람들을 대상화하려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끝내 포기했다.
시인 신경림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황재형은 목에 힘을 주고 광부들을 지도하겠다고 설치는 화가가 아니라 그들 속에 들어가 거꾸로 그들로부터 삶의 진실을 배워 화폭에 옮겨 놓는 화가임을 확인했다.”(1991년 가나아트센터 ‘쥘 흙과 뉠 땅’전 도록)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면 그림 속 광부의 삶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누구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속에서 살고 직장을 다니지만, 때때로 그 삶에 매몰되다 보면 자아나 본성을 잃어버린다. 그런 세상 속 광부들에게 이야기와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작가는 말한다.
“세상 어디든 희망 없는 곳이 바로 ‘막장’이다. 광부는 서울이나 부산에 더 많을 수 있다.”
○ 당신의 몸속에 백두대간이 있다
대작 ‘백두대간’의 시작은 광부 동료들과 탄광 일을 마친 어느 날이었다. 하루의 노동을 술 한 잔으로 달래고 헤어지던 어두운 밤, 황재형은 산골을 타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회오리 바람을 마주했다.
“바람이 깊은 계곡을 타고 나오며 눈보라 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해저에서부터 지각 변동을 타고 솟아나온 카르스트 지형이다. ‘이것이야 말로 속에서 역동적으로 끌어 올려지는 용솟음이 아닌가, 내가 정말 그려볼 장소를 만났구나. 저 생명력을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작가는 화구를 들고 다시 산에 올랐다. 캔버스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려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젯밤의 에너지는 온데 간데 없고 차분하고 고요한 아침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이러면 일반 풍경화 달력 그림이지 뭐야 이게! 내가 느꼈던 건 이게 아닌데 안되겠어.’
가져온 짐을 다시 꾸려 하산하려던 작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건 내재되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광란도 폭풍우도 자연이 담고 있다. 밖으로 나왔을 땐 현상에 불과한 데, 왜 겉모습만 보고 실망해서 가려 하나?’
이 때의 깨달음은 ‘백두대간’에 20년이 넘는 시간을 매달리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의 고뇌와 씨름은 작품 속 공간이 태백산맥을 넘어서게 만들었다. 그림은 산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 산은 우리가 휴양하러 찾는 피안의 자연이 아닌 인간의 조건이다. 바닷속 땅이 용솟음 칠 때부터 인간이 묵묵히 흘려온 땀과 역사가 담긴 거대한 몸이다.
사람의 몸으로서 자연은 어떤 의미일까? 작가는 구부러진 산맥과 구릉을 할머니의 손에 비유했다.
“그 손을 보면 마디가 지고 구릉이 진다. 내 코 앞에 손을 놓고 보면 바로 그것이 산의 모습이다. 나의 조상으로부터 흘러 내려와 골골이 사무치고 구릉으로 내닫는 묵묵한 생명력이 산인 것이다.”
그림 속 아버지의 얼굴에는 백두대간의 산맥의 구릉처럼 만들어진 주름이 졌다. 그 주름 속엔 그가 겪은 삶의 굴곡들이 있다. 그럼에도 맑은 눈은 희망과 생명력을 말한다.
“계급의 간극도 삶의 주름이요, 척박한 막장 환경을 편안해 하는 굴욕적인 적응력도 삶의 주름이라는 억지가 언제부턴가 피어 올라왔다…온갖 삶의 주름은 얼굴의 주름처럼 앙금으로 남았다. 놀라운 건 삶의 주름이 그렇다 해도 그것은 주름일 뿐 존재와 본질은 변함없이 희망을 이야기 한다.” (2013년 광주시립미술관 개인전 ‘삶의 주름 땀의 무게’ 윤범모의 글에서 황재형 작가의 말)
그림 ‘백두대간’은 말한다. 삶과 역사의 모든 굴곡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몸 속에는 백두대간이 있다고. 태고부터 흘러 내려온 생명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 아름다움은 삶에서 나온다
그는 1997년 ‘태백미술연구소’를 만들고 매년 미술 캠프를 열고 있다. 처음 열었을 땐 교사 7명에 학생 2명이 찾았지만, 지금은 40여 명이 찾는다. 이는 관념이나 장식을 위한 예술이 아닌 삶과 맞닿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와도 맞닿아있다.
“오랜 세월 동안 예술이 특권적인 것으로 이야기 되어 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현실과 상관없는 ‘유미주의’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것은 서구의 예술 관념이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오면서 굴절되어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국제 미술사는 특정 계층의 역사를 벗어나 보편적 인권의 확장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물론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각 지역별 주체의 맥락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국내 미술사는 일제시대와 미술수첩을 통해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진 미술사, 이 때문에 관념적으로 예술을 접근한 관점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어디에도 ‘한국’을 찾을 수 없었던 작가들이 저마다의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 중 황재형 작가는 삶의 처절한 현장을 찾아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현실의 인간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다.
미술사가 전하현은 그의 작업에 대해 “삶에서 배태된 예술을 추구하는 한국 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예”라며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은 한국의 큰 문화적 자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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