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탕!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한 한국인의 운명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30일 11시 40분


1922년 7월 2일



플래시백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 부두에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도착했습니다. 필리핀을 방문한 뒤 돌아가는 길이었죠. 다나카는 조슈 군벌에 속하는 군부 거물이었습니다. 육군대신이던 1920년에는 ‘간도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을 세워 지휘했죠. 그 결과 만주에 있던 수많은 조선동포들이 학살당한 경신참변이 일어났습니다.

부두에는 환영객들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인 3명도 있었죠.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서자 갑자기 탕! 탕! 탕! 총성이 울렸죠. 하지만 총탄은 앞서나오던 미국인 여성이 맞고 맙니다. 급하게 차 안으로 피하는 다나카에게 다시 총탄 두 발이 발사됐고 폭탄도 날아들었죠. 하지만 총알은 모자를 뚫고 나가는데 그쳤고 폭탄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다나카의 차에 다시 폭탄이 날아갔지만 역시 불발이었죠.

①은 의열단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던 상하이 부두. ②는 1차 저격에 나섰던 오성륜 ③은 2차 
저격을 맡았던 김익상 ④는 최후 저격을 책임졌던 이종암. ②와 ④는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공.
①은 의열단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던 상하이 부두. ②는 1차 저격에 나섰던 오성륜 ③은 2차 저격을 맡았던 김익상 ④는 최후 저격을 책임졌던 이종암. ②와 ④는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공.


다나카 저격은 한국인 3명이 차례차례 시도했습니다. 오성륜이 1선, 김익상이 2선, 이종암이 3선을 각각 맡았죠. 세 사람 모두 의열단 소속이었습니다. 이들은 거사 계획 때 저마다 자기가 다나카를 처치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나섰습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의논 끝에 명사수 오성륜이 1차로 시도하고 김익상과 이종암이 뒤를 잇기로 결정했죠.

오성륜은 바로 붙잡혔고 김익상은 뒤쫓아 오던 영국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체포됐습니다. 두 사람이 경찰의 시선을 끌면서 이종암은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었죠. 그런데 오성륜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있다가 한 달 가량 지나 일본인 죄수와 함께 극적으로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일제는 김익상마저 놓칠까봐 나가사키로 압송했죠. 그런데 조사를 거치면서 일제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동아일보는 김익상의 거사를 저격 때부터 줄곧 보도했다. 거사부터 사형 판결까지 주요 기사 제목을 오른쪽부터 시간 순으로 배치해 보았다. 당시 취재가 어려웠던 탓인지 김익상의 한자 이름이 틀리기도 했고 오성륜을 오상륜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김익상의 거사를 저격 때부터 줄곧 보도했다. 거사부터 사형 판결까지 주요 기사 제목을 오른쪽부터 시간 순으로 배치해 보았다. 당시 취재가 어려웠던 탓인지 김익상의 한자 이름이 틀리기도 했고 오성륜을 오상륜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1년 전 9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뒤 귀신같이 사라진 사람이 바로 김익상이었던 것이죠(동아플래시100 7월 21일자 참조).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글을 읽으면 머리가 아파 공부는 하지 않았으며 연초공장에 다니다 꿈꾸던 비행사가 되려고 상하이로 갔다고 말했죠. 중국 내란으로 비행기학교가 없어져 여기저기 떠돌다 김원봉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익상은 재판 때도 자신의 의열투쟁을 웃으면서 당당하게 시인했습니다. 그는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뒤 큰 영향이 없자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과 조선 대관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말했죠. 또 “어떤 형벌이든지 사양하지 않을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 김익상, 제3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 조선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본 대관 암살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국내 신문 중 유일하게 기자 유광렬을 특파해 재판 과정과 김익상의 발언을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김익상은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사형이 선고돼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이후 일본 황태자 결혼식 때 무기징역으로 감형, 천황 즉위식 때 20년으로 또 감형됐습니다. 축하의 뜻으로 일괄적인 감형혜택이 적용됐던 것이죠. ‘약산과 의열단’ 책에 따르면 그는 1942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27세 피 끓는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①과 ②는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붙어 있는 김익상과 그의 동생 김준상. 
③은 동아일보 1926년 2월 17일자 <떡국을 끌여노코(2)>에 소개된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 송 씨. ①과 ②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①과 ②는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붙어 있는 김익상과 그의 동생 김준상. ③은 동아일보 1926년 2월 17일자 <떡국을 끌여노코(2)>에 소개된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 송 씨. ①과 ②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김익상의 목숨 건 투쟁의 대가는 가족에게도 큰 희생을 불러왔죠. 총독부 공격 때 들렀던 동생 김준상은 경찰에 고초를 겪었고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1925년 아내만 남겨둔 채 세상을 등졌습니다.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 송 씨는 1926년 설에 동아일보에 “(남편을)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아요. 이것(3세 딸)이나 알뜰히 키울랍니다”라고 말했죠. 김익상이 출옥했을 때 아내는 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김익상 본인은 이내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죠. 그의 나이 47세 때였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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