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 사회주의는 한반도 북쪽에서도 건너오고, 동쪽에서도 넘어왔습니다. 북쪽의 발원지는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였습니다. 그럼 동쪽은 어디일까요? 예,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유학생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한반도로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였죠. 사회주의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가 라는 점은 그때 지식인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습니다.
1922년 4월 18일자 1면에 ‘말크스의 유물사관 1’이 실린 것은 동아일보 나름의 대응이었죠. 말크스는 칼 마르크스를 말합니다. 연재는 5월 8일까지 총 18회 실렸습니다. 연재가 끝나기가 무섭게 ‘막쓰 사상의 개요 1’이 또 게재됩니다. 5월 11일자였죠. 막쓰는 역시 마르크스를 가리킵니다. 마르크스의 표기조차 통일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죠.
‘막쓰 사상의 개요’는 6월 23일자까지 총 37회 연재됐습니다. 앞서 연재한 ‘말크스의 유물사관’이 어렵다고 일부 독자들이 불평하자 좀 더 쉽게 풀어썼죠. 마르크스주의를 유물사관과 경제론, 정책론의 3대 원리로 나눠 설명했습니다. 이 원리를 계급투쟁론이 관통한다고 했죠. 너무 단순해질 우려가 없지 않지만 연재의 내용을 압축해 보겠습니다.
유물사관은 달걀과 병아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병아리가 형체를 갖출 때까지 달걀은 보호막 역할을 하죠. 하지만 병아리가 부화할 때쯤에는 달걀은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달걀을 깨고 나와야만 병아리가 살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사회조직은 처음엔 생산력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지만 생산력이 점점 커지면 억압하는 관계로 뒤바뀐다는 겁니다. 사회조직을 탈바꿈시키는 수단이 계급투쟁이라고 했죠. 경제론은 가치를 창출하는 요소는 노동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됩니다. 노동가치설이죠. 자본가가 제값을 주지 않고 잉여가치를 약탈하기 때문에 불평등이 빚어진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정책론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구별과 불로소득을 없애서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죠.
두 연재를 맡은 사람은 이순탁이었습니다. 집안이 어려웠지만 인촌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의 학비 지원으로 게이오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죠. 게이오대학 시절 스승이 일본 마르크스학의 권위자라는 가와카미 하지메였고 이순탁은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로 불렸습니다. 돌아와 경성방직과 조선상업은행을 거쳐 연희전문 상과 교수가 됐고 학과장까지 지냈죠.
이순탁의 마르크스주의는 가와카미의 초기 사상에 토대를 두었고 본인 성향도 반영돼 점진적 사회개조와 계급협조 색채가 짙었습니다. 물론 혁명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사회개량주의 노선을 지켰던 것이죠. 조선의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시점에 정치혁명으로 사회혁명을 이루려는 것은 무모하다고 보았습니다. 가와카미의 책을 번역한 연재에도 이런 판단이 깔려 있었죠.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죠. 더 못해진다는 의미도 되지만 풍토에 맞게 바뀐다고 이해해도 됩니다. 이순탁의 마르크스주의가 바로 귤화위지였을 겁니다. 이순탁은 이듬해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물산장려운동을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기도 했죠.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일본 학자들의 ‘노동가치설과 평균이윤율의 문제’(총 8회) ‘맑스 노동가치설에 대한 비평의 비판’(총 13회) ‘노동가치설과 평균이윤율의 재론’(총 7회)을 계속 1면에 실어 마르크스주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사회주의의 핵심과 정신을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설(동아플래시100 8월 25일자 참조)에 맞춘 지면 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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