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각종 기전 승승장구로 대기록… 1988년 이창호 승률 88% 넘어서
인간 최초 바둑점수 3800점 돌파
랭킹2위 박정환과 남해서 빅매치
7차례 대국서 승률 유지할지 주목
“승률 80%요.”
2000년대 중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세돌 9단이 “올해 목표는?”이란 질문을 받으면 입에 달고 다닌 대답이다. 기전 우승에는 관심 없고 오직 승률을 올려 명예를 갖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답은 “승률 80%면 우승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승률 80%는 우승이 따라오는 매직 숫자. 야구로 치면 3할 5∼7푼을 치는 것과 비슷하다. 최고 타율은 물론 홈런왕, 최다 안타, 장타율 등의 타이틀이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바둑계 역대 기록은 1988년 이창호 9단이 세운 88.2%(75승 10패). 갓 입단한 만 13세 소년이 나래를 펼치기 시작할 때 세운 기록이다. 각종 기전의 예선부터 참가해야 했던 이 9단에게 웬만한 프로기사들은 상대가 되질 못했으니 이 9단의 승승장구는 불문가지였다.
그런데 승률 90%는 어떨까. 야구의 4할 타자와 같다. 그런데 올해 이 어려운 일을 해낼 것 같은 기사가 있다. 신진서 9단(20)이다.
그는 올해 49승 5패로 승률 90.74%를 기록 중이다. 이 무시무시한 성적은 예선 대국이 거의 없이 국내외 대회 본선과 결승 대국에서 거의 얻은 것이어서 더욱 입이 떡 벌어진다. 이세돌 9단의 말대로 승률 90%를 달리는 그는 올해 4개 기전에서 우승했다. 세계 기전인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국내 기전인 GS칼텍스배,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용성전 등이다.
만 20세인 신 9단은 그동안 차세대 1인자로 꼽혔지만 올해 들어 만개하고 있다. 타이틀 획득은 물론 국내 랭킹에서 10개월 연속 1위를 달리고 있고, 그동안 역대 전적에서 뒤지던 박정환 9단에게 올해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신 9단은 인공지능(AI)에 가장 가까운 바둑을 두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인공지능이 가장 좋다고 추천하는 이른바 ‘블루 스폿’을 결정적인 장면에서 어김없이 둔다는 것이다. 별명도 ‘신공지능’이다. 중국 1인자 커제 9단은 “지금의 신진서는 인공지능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 사람 모습을 한 AI”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달 1일 발표된 ‘고레이팅’ 점수에서 신 9단은 인간 최초로 3800점을 넘었다. 프랑스 인공지능 학자가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고레이팅은 대국 결과를 바탕으로 랭킹을 매긴다. 바둑계에선 비공식 세계랭킹으로 본다. 3800점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대결한 ‘알파고 리’의 점수가 3739점이다. 신 9단이 알파고 리와 붙는다면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공지능’이 승률 90%를 과연 유지할 수 있을까. 신 9단은 현 상태에서 한 판만 져도 승률이 89%로 떨어진다. 연말까지 남은 공식 기전은 KBS바둑왕전 4강, 삼성화재배 본선, KB바둑리그 등 10여 국이다. 여기서 2번 지면 90% 유지는 어렵다.
그런데 최근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경남 남해군에서 국내 랭킹 1, 2위인 신진서, 박정환 9단이 7차례 대국을 갖는 특별 기전을 만든 것. 보통 기전은 7전 4선승제지만 이번엔 무조건 7번 대국을 한다. 승자는 1500만 원, 패자는 500만 원의 대국료를 받는다. 신 9단은 7일 열린 대회 기자회견에서 “4승 3패만 하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말대로라면 승률 90%는 언감생심이다. 국내 랭킹 1, 2위의 대결인 만큼 박빙의 승부를 점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올해 신 9단과 박 9단의 상대 전적을 살펴보면 약간 생각이 달라진다. 두 기사는 올해 LG배,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용성전 결승에서만 만났는데 각각 2-0, 3-0, 2-0으로 신 9단이 박 9단을 셧아웃시켰다. 박 9단을 상대로 7승 무패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 셈이다. 실력이 비슷한 두 기사의 전적이 이렇게 차이 나는 것은 그만큼 신 9단의 기세가 박 9단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바둑계에선 특별 대국 첫판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김승준 9단은 “만약 첫판을 신 9단이 이긴다면 이후에도 승승장구할 가능성이 높다”며 “박 9단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최전성기의 기사들이 한번 승세를 타면 누구도 막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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