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은 동화에만?…아름다운 사랑은 상상 속에만 있는게 아냐”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4일 20시 41분



“지금 보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네요. 어쩜 이렇게 한 치도 더 크지 못했는지….”

김창완 씨(66)가 통기타와 DIY 방식으로 만든 37년 만의 새 정규앨범 ‘門’(18일 음원·CD 발매)으로 돌아온다. 같은 방식으로 제작한 솔로작 ‘기타가 있는 수필’(‘어머니와 고등어’ 수록)을 낸 게 1983년. 11곡을 담은 신작 ‘門’의 부제는 ‘시간의 문을 열다’다.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만난 김 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두서너 번 끄덕였다.

“시간이란 객관화할 수 없는 건가 봐요. 그것이 흐른다는 것, 멈춘다는 것. 이게 모두 착각일 뿐인지도…. 시간의 본질을 아는 것이 곧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첩경일는지 모르겠어요.”

37년 전 ‘어머니와 고등어’에서 냉장고 문을 열던 29세의 신혼 김창완이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2020년에 새삼 다시 열어본 시간의 문 안쪽엔 무엇이 있었을까. 연년의 켜가 채운 충만함보다는 차라리 텅 빈 냉장고 같은 허허함인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채우려야 채울 수 없는 밑이 빠진 독이랄까. 아니면 넘쳤기에 비워진 계영배(戒盈杯) 같은 잔일지도.

“‘기타가 있는 수필’은 당시 마장동 스튜디오에 통기타 하나 들고 들어가 세 시간 반 만에 원테이크로 녹음을 마쳤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아요. 미리 발표했던 곡을 빼고 새로 작업한 여섯 곡은 두 시간 만에 녹음하고 나왔어요.”

그렇게 따지면 서울 성동구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간 지 근 40년 만에 마포구 톤스튜디오의 문을 이제야 뒷목 긁으며 연 것인지 모른다. ‘보고 싶어’의 트럼펫, ‘옥수수 두 개에 이천 원’의 하모니카 소리는 기타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손수 만들어냈다. 신작에서 유일하게 보컬 합창과 제창이 나오는 ‘글씨나무’마저 보컬 하모나이저 이펙터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분신처럼 나눠 녹음했다. ‘먼길’의 첼로(양지욱), ‘시간’의 반도네온(고상지)을 제외하면 모두 김 씨의 연주인 셈이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오토튠(녹음 뒤 부정확한 음정을 인위적으로 완벽하게 조정해주는 장치)을 써본 적 없다. 신작도 마찬가지.

“제프 쿤스가 ‘풍선 강아지’에서 보여줬듯 맨질맨질함(반질반질함), 완벽함은 현대인의 환상일 뿐이잖아요. 신작은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세상을 향한 반란일 수도 있어요. 제 나름의 불만을 거침없이 거칠게 쏟아낸 앨범이에요.”

‘보고 싶어’에서는 민요 ‘한오백년’의 멜로디를 기타로 연주했다.

“저희 아버지가 ‘고향무정’을 부르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 비슷한 저의 심정을 담아봤어요.”

가사가 필요 없는, 멜로디가 건네는 이야기는 첫 곡이자 연주곡인 ‘엄마 사랑해요’부터 작렬한다.

“앨범 표지를 그려준 이 화가가 모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매일 어머니를 스케치했다더라고요. 매일 똑같아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의 선으로 그려내듯, 저도 단번에 기타 멜로디를 만들어갔어요.”

‘나이 든 여자가 다가와 앉아도 되냐고 물었지/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어’(‘노인의 벤치’ 중)


신곡 ‘노인의 벤치’에서 김 씨는 37년 전 곡 ‘꿈’(토크송)의 자신과 문 너머로 교신한다. ‘꿈’에서 왕자와 공주의 동화를 동경했던 화자, 김창완은 “다시 한번 아주 예쁜 동화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2016년 싱글로 먼저 낸 신작 수록곡 ‘시간’은 따라서 이제야 그 진면모를 드러낸다.

‘유치한 동화책은/일찍 던져버릴수록 좋아’(‘시간’)는 ‘해피엔딩은 동화에나 있는 얘기’라는 체념이나 훈계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 반대였다.

“아름답거나 영원한 사랑은 상상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현실의 이 사랑이 동화책과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 게 37년 전 ‘꿈’이에요. 신작은 세월이 흐른 뒤 그걸 확인한 목격담인 셈이죠.”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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