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천제(天帝)의 궁궐인 자미원
하늘 강(天漢) 은하수를 상징하는 한강(漢江)
세종에게 왕위 물려준 태종, 광진구 자양동 천시원 별자리에 머물러
‘서울은 하늘의 별자리 기운이 지상으로 내려온 천문(天文)의 도시다. 경복궁과 한양도성은 하늘의 으뜸 별자리인 자미원(紫微垣)이고, 광진구는 천시원(天市垣), 은평구는 태미원(太微垣) 별자리에 해당한다. 한양도성 남쪽에서 서해로 흐르는 한강은 은하수다.’
이는 조선 세조 때 풍수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지위까지 오른 지관 문맹검의 한양 천문풍수론을 현재 상황에 맞게 풀어본 것이다. 1452년 그가 조선의 국도(國都) 한양의 지세를 살펴본 후 임금에게 보고한 원문은 이렇다.
“지금 우리 국도는 위로는 천성(天星·하늘의 별자리)에 응하여 삼원(三垣·동양의 중요 별자리인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형상이 환하게 갖추어졌습니다. ▲가운데로는 백악(경복궁 뒷산)이 있어 만갈래 물과(萬水)와 천가지 산(千山)이 모두 일신(一神)에게 조회(朝會)하니… 참으로 천상북극(天上北極)의 자미원이라 이를 만합니다. ▲동쪽으로는 낙천정(樂天亭·광진구 자양동 일대)이 있어 백가지 근원(百源)이 와서 모이게 되니, 이 또한 천상(天上)의 천시원입니다. ▲서쪽으로는 영서역(迎曙驛·은평구 역촌동 일대)이 있어 성(城·산)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길이 멀리 있으니 이 또한 천상의 태미원입니다.”(조선왕조실록 문종2년 3월3일 기사)
한마디로 서울은 하늘에서 가장 중심 되는 별자리인 삼원의 기운이 내려온 신성한 땅이라는 얘기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양 별자리와는 다른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알아야 한다.
● 한양은 우주의 중심
동양권에서는 북쪽 하늘에서 1년 내내 보이는 주극성(週極星)들을 크게 자미원, 천시원, 태미원의 3원(垣·담장)으로 구분해 불렀다. 또 3원의 별자리들은 그 형태와 움직임 등을 통해 지구 환경과 인간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3원의 별들이 지상의 인간사회를 연상시키는 명칭을 갖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원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있는 자미원(총 39개 별자리)은 ‘하늘 궁전’으로서 ▲하늘나라 임금(북극성)과 그 대행자인 북두칠성 ▲왕비와 태자 등 임금의 가족을 가리키는 북극오성 ▲대장군, 삼정승, 비서실장 등 여러 신하 별들로 구성돼 있다. 자미원 왼편에 있는 태미원(총 20개 별자리)은 하늘 임금이 실제 정사를 펼치는 곳으로 제후와 대신 등 정부 관료들이 모인 하늘나라의 정부종합청사라고 할 수 있다. 자미원 오른편에 위치한 천시원(총 19개 별자리)은 하늘나라 백성들이 거주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도시 또는 장터에 해당한다.
서울의 한양도성이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이라는 문맹검의 주장은 중국 명나라를 황제국으로 삼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지상의 자미원은 하늘임금(혹은 옥황상제)의 천명(天命)을 부여받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한중일 삼국의 불문율이었다. 문맹검의 발언은 중국 베이징(北京)에다 자미원을 상징하는 자금성(紫金城)을 만든 명나라 황제에 대한 도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문맹검의 이런 발언이 결코 돌출 행동은 아니었다. 명나라를 떠받들며 사대하던 유학자들을 빼고는 조선 초기의 식자층은 고려까지 이어져 내려온 황제국의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문맹검이 활동하던 조선 세종에서 세조 때까지만 해도 고려 출신 조선의 신하들은 나라의 국격과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 태종 때 문신 변계량(1369~1430)은 황제만 천제(天祭)를 지낼 수 있다고 정한 중국의 원칙을 무시하고 조선의 왕이 천제를 지낼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우리 동방 땅은 단군이 시조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후손으로서 1000년 이상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문맹검의 정확한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고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의 궁궐에다 고려 전통의 불교 내불당 자리를 마련했고, 고려 특유의 천문관과 비보(裨補)풍수 등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게 그 근거다.
● 천시원으로 흘러드는 은하수 한강
자미원과 천시원, 태미원이 그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조선시대 천문도)를 바탕으로 문맹검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별자리 현장들을 직접 둘러봤다. 먼저 천시원으로 지목된 낙천정을 찾았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남쪽에 해당하는 서울 광진구 자양2동에 있는 조그마한 정자다. 천문도에서는 천시원이 자미원의 왼편(서북 방향)에 있지만, 지상에서는 자미원(경복궁)의 오른편에 있다. 거울에 사물이 비춰질 때 좌우가 바뀌는 것처럼 하늘의 모양이 땅에서는 위치를 달리한 것이다.
낙천정은 정확히 잠실대교 북단에 위치한 현대강변아파트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한때 서울시 기념물(제12호)로 지정됐다가 지금은 해제된 상태다.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데다가 아파트 건설공사와 함께 복원한 정자가 조선시대 건축 양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의 낙천정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을 위해 건립한 정자로 대산(臺山·당시의 산 이름)의 정상에 있었다. 태종은 말년에 임금 자리를 아들 세종에게 넘겨준 뒤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경치가 빼어난 대산 일대에 별궁과 정자를 지어 부인과 함께 지냈다. 낙천정이라는 이름은 당시 좌의정 박은이 ‘역경(易經)’의 구절인 ‘천명을 알아 즐기노니 걱정이 없네(樂天知命故不憂)’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산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형도를 살펴보면 말년의 태종 별궁 터는 현재 아파트 자리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서는 아직도 경복궁의 땅 기운에 버금가는 지기가 느껴진다.
지형적으로도 길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산은 멀리 경기 구리시의 검암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망우산, 아차산을 거쳐 한강을 마주하면서 대장정의 발걸음을 멈춘 곳이다. 천리만리를 달려온 용(산줄기)이 마지막 용트림을 한 곳이다. 이런 곳에 명당 혈이 맺히는 경우가 많다.
문맹검은 대산까지 이어져 내려온 산줄기를 천시원의 영역을 표시하는 천시원의 오른쪽 담장(右天市)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인정한다면 천시원의 왼쪽 담장(左天市)은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서 한양대 언덕을 거쳐 성동구 응봉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된다. 이 두 산줄기 사이에 들어선 자양동, 성수동 등 광진구 일대가 천시원의 주요 활동공간인 셈이다.
천문도의 천시원과 광진구 권역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점도 발견된다. 천문도에서는 견우(염소자리 별)와 직녀(거문고자리 별)가 칠월칠석에 만나는 장소인 은하수가 천시원으로 흘러들어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밀키 웨이(milk way)’로 불리는 은하수는 동양에서는 ‘용이 살고 있는 시내’라는 뜻의 미리내, 하늘의 강이라는 뜻의 천하(天河) 천한(天漢) 은한(銀漢)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긴 줄 모양의 은하수는 한 줄기로 있다가 천시원 권역에서 섬처럼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 줄기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져 한 줄기가 된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지상의 한강 물줄기다. 강원도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남한강이 경기 양평군 양수리에서 합수된 한강은 낙천정이 있는 광진구 권역으로 도도하게 흘러들어온다. 문맹검이 “낙천정으로 백원(百源)이 모여든다”고 한 것도 이런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낙천정이 있는 한강이 바로 은하수인 것이다.
일부 중국인들은 서울이 중국 한나라를 본 딴 이름인 한성(漢城)이고, 강 이름도 한강(漢江)이라며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오해는 한성과 한강의 ‘한’이 은하수 이름인 ‘천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 태종이 머문 낙천정은 임금자리 별
조선왕조는 천시원의 낙천정과 태미원의 영서역에 각각 이궁(離宮·임금이 나들이 때 머무는 별궁)을 세우기로 계획했다. 경치 좋은 한강변 낙천정의 이궁은 임금이 정무에 지친 몸을 잠시 추스르기 위한 휴양의 장소로, 영서역쪽 이궁은 임금이 수시로 행차해 농민들의 농사일을 독려하고 관찰하는 장소로 설계됐다.
이 역시 별자리 기운에 대응해서 마련된 것이다. 천시원 중심부에는 ‘제좌(帝座·임금 자리)’라는 별자리가 있다. 자미원 궁궐에 기거하는 하늘임금이 천시원으로 나들이해 직접 국정과 백성을 챙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실재 역사로 이어졌다. 태종이 머물던 낙천정의 이궁, 즉 제좌 별자리가 있는 곳으로 세종이 국정을 자문할 겸 자주 찾았던 것이다. 세종은 태종과 함께 이곳에서 당시 조선을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계획했고, 대마도 정벌 후에는 이종무 장군을 격려하기 위한 연회를 열기도 했다. 아쉽게도 현재 이곳의 이궁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궁 터에 지어진 아파트 주민 대부분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옛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울은 하늘 천문의 세계를 스토리로 삼아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도시다. 다음호에는 서울의 태미원 별자리를 찾아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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