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잡지 ‘신천지’ 주간과 영업부장이 경찰에 잡혀간 지 이틀만인 1922년 11월 22일 역시 월간 ‘신생활’의 사장과 인쇄인이 붙잡혀 갔습니다. 3일 뒤에는 신생활 기자 3명이 수감됐죠.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월간지 2곳이 일제 경찰에 의해 초토화되다시피 당한 겁니다. 신천지 백대진 주간의 사연은 2020년 10월 27일자에 소개했으니까 이번에는 신생활 필화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922년 3월 창간된 신생활은 5호까지는 순간(旬刊)이었고 6호부터 월간이 됐습니다. 사장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죠. 이사 겸 주필인 김명식은 제주 출신으로 동아일보 논설반의 논객으로 활약했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 간부였습니다. 김명식이 하나 둘 영입한 기자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었죠.
신생활은 창간호부터 발매금지 당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1, 6호가 발매금지됐고 4호는 압수됐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잡지의 성향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0호부터는 논조가 한층 강해졌죠. 볼셰비키 혁명과 무산계급 독재를 표나게 강조한 겁니다. 공교롭다고나 할까요. 10호 발행 직전에 신생활은 정치와 사회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총독부가 보증금 300원씩을 받고 신생활 신천지 개벽 조선지광 등을 신문지법에 따라 발행하도록 허용했죠. 출판법으로 허가받은 잡지는 학술과 기예 기사만 실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 조치가 수상쩍었습니다. 신임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요시가 이 조치 한 달 전에 관련자들을 불러다 엄포를 내렸기 때문이죠. “지금 과격사상과 공산주의 등을 선전하는 언론이 많다. 앞으로 행정처분과 사법처분으로 나눠 처벌하겠다.” 이때까지는 못마땅한 신문이나 잡지는 삭제나 압수 발매금지 같은 행정처분만 내렸죠. 사법처분이래야 벌금형이 고작이었고요. 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잡아넣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언론계를 위해 안심할 현상인가 안심치 못할 현상인가”라며 동업자들에게 조심하자고 당부했죠.
그러나 신생활은 직진했습니다. 신문지법 허가를 받고 발행한 두 번째 잡지인 11호를 ‘러시아혁명 5주년 특집호’로 꾸몄죠. ‘노국혁명 5주년 기념’과 ‘5년 전 금일을 회고함’ 기사가 문제가 됐습니다. 12호에 실은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과 ‘자유노동취지서’도 걸렸죠. 검경은 11, 12호를 발매금지하고 대대적인 수색도 벌였습니다. 이 판국에 고등법원 검사장은 한술 더 떠 “독립주의나 공산주의를 학설로만 소개해도 읽는 사람들이 선동이 되면 단속하겠다”고 협박했죠. 전체 언론계가 얼어붙을 지경이었습니다.
사장 박희도와 이사 겸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 유진희 등 신생활 관계자 4명이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동아일보는 1922년 12월 27일자 3면에 '조선 초유의 사회주의 재판'으로 크게 보도했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제외한 언론계가 단합해 언론자유를 보장하라고 촉구했고 뜻있는 변호사들도 대거 변론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박희도 2년6개월, 김명식 2년, 신일용과 유진희 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죠. 인쇄기 1대도 몰수당했고요. 총독부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1923년 신생활을 폐간시키고 말았습니다.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김명식은 힘겨운 노역에 늑막염과 폐병이 겹쳐 죽을 지경이 됐습니다. 몸이 약했던 그가 견딜 수 없는 수감생활이었죠. 약 반년 만에 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청각을 잃어 필담으로 대화해야 했고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얻었습니다. 그는 생활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일제에 저항하는 의지와 사회주의를 향한 집념은 굽히지 않았죠. 1943년 숨질 때까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 매체에 글을 쓰며 일제 치하의 하루하루를 견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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