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예술인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극장, 공연장, 무대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그나마 생긴 일자리도 갑자기 없어지기 일쑤다. 지난달 26일 제작사 대표가 잠적해 일찍 막을 내린 대학로 연극판의 단면은 예술계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 현실은 상대적으로 무명의 배우 가수 방송인에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다. 무력감이 밀려오지만 예술을 위해서라면 버텨야 한다.
코로나19로 본래 일터를 떠나 손에 잡히는 대로 생계를 이어가는 배우(연극 뮤지컬), 인디밴드, 스태프 등 8명을 만났다. 볼멘소리를 꺼내기도 이들은 조심스럽다. “저희만 힘든가요. 예술인의 애환이자 숙명인가 봅니다.”
● 김한 배우의 ‘코로나 하루’
지난해 국립극단 시즌제 단원으로 뽑혀 매일 연습실에 가던 배우 김한(42)은 요즘 서울 마포구 집에서 경기 화성시 한 빵집으로 출근한다. 지난달 21일 오전 6시, 눈을 부비며 승용차에 올라탄 김한은 동 틀 무렵까지 1시간 20분을 달린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을 지날 때쯤 “여기서 얼마 전까지 공연했는데…. 11월까지 공연 스케줄이 꽉 차있었는데 줄줄이 끊겼다”며 입을 뗐다. “배우는 몸 쓰는 직업이라 교통사고 위험이 있는 장거리 운송 알바는 가급적 안할 생각이었어요.”
낮에는 빵집카페에서 일하고, 밤에는 극장에서 공공근로를 한다. 배우 활동이 아예 끊긴 건 아니다. 오디션이 가뭄에 콩 나듯 열린다. “다행히 강릉에서 촬영하는 영화 단역을 맡아서 다음주엔 오전 4시쯤 일어나야 할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최근엔 충남 천안에서 마당극 공연도 했다.
오전 7시 30분, 빵집에 도착하자 하얀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빵을 진열하고 포장한다. 첫 손님이 들어오자 힘차게 “어서오세요!” 외친다.
오전 10시, 빵집 건물 6층 빵공장에서 인천에 배송할 빵을 트럭에 분주히 옮겨 싣는다. 매일 경기 화성과 인천을 오가며 지점에 빵을 배달한다. 일이 많은 때는 서울, 화성, 인천, 천안을 오가느라 일주일에 2000km를 달린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연기할 자리가 생기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일정을 조율하는 게 몸보다 더 힘들다”며 “마당극 공연도 사장님이 배려해주신 덕분”이라고 했다.
오전 11시를 넘겨 인천 남동구의 매장에 도착해 빵을 옮겨 놓고는 화성으로 향한다. 낮 12시 화성에서 2차 배송이 예정돼있다. 끼니를 챙길 시간도 마땅치 않다. “2차 배송도 끝나면 서울에 가서 저녁 알바도 해야 한다”는 그는 “제 미래만큼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공연계의 미래 때문에 더 힘들다”고 했다. 랜선 공연이 늘면서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고민이다. “10년 후에도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요?”
오후 5시, ‘두 번째’ 직장으로 출근한다. 한 달 전부터 서울문화재단의 공공지원사업에 뽑혀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 예술인을 돕는 새 일자리다. 하루 8시간 언제 재가동할지 모르는 무대와 극장을 정비한다.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다음날 오전 1시. 빼곡하게 짜인 그의 일과도 언제 갑자기 바뀔지 모른다.
● “돈을 바라면 못한다는 일이지만, 그래도…”
생활고는 늘 함께였다. “돈을 바라면 예술을 오래 못 한다”는 말에 수긍해왔지만 올해는 뼈아프다. 인디밴드 트레봉봉의 드러머 김하늘은 “생활고는 몸에 익었다. 관객과 대면하지 못하는 상황이 더 힘들다”고 했다.
“꿈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는 7년차 뮤지컬 배우 김주왕(34)도 고됨의 연속이다. 배우들 대상으로 운동수업도 병행했지만 일이 끊기자 스크린골프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스크린골프장이 문을 닫은 뒤 지금은 동창에게 부탁해 방역업체에서 일한다. 퇴근 후엔 뮤지컬 관련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 예술을 이어갈 방법은 유튜브가 유일하다.
소중한 무대가 간혹 열리면 무대에 굶주린 이들이 모여든다. 올 9월 열린 ‘펜타 유스스타’ 경연에는 299개 밴드가 몰렸다. 1, 2등에게만 온라인으로 열리는 ‘인천 펜타포트 음악축제’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경쟁률 150 대 1인. 지난해 경쟁률은 20 대 1 수준이었다. 트레봉봉 리더 성기완(53)은 “3등으로 기회는 놓쳤지만 뮤지션들의 절박함을 느꼈다”고 했다.
11년차 음향감독 김병주(32)는 요즘 넓이 90㎡ 남짓한 창고로 출근해 음향장비를 쓸고 닦고 점검한다. 그는 “장비상자에 거미줄 쳐진 거 처음 봤어요. 너무 신기해서 사진도 찍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9월부터 연말까지가 성수기지만 지금은 대출로 버틴다. 내년 2~3월이 최대 고비다. 대리운전을 시작한, 2년차 조명감독 이정수(30)는 “이건 기본”이라고 했다. 오전 4시까지 일하는 그는 오랜만에 공연 현장에 일감이 생겨 1박 2일로 충북 괴산에 다녀왔다. “집에 가면 씻고 바로 대리 뛰어야죠.”
‘뮤지션 유니온’이 9월 독립음악인 151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음악활동을 통한 월 평균 수입은 지난해 같은 기간 53만 원에서 32만 원으로 줄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UIC 경제학과 졸업 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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