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읽는 법]신념이라는 가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7일 03시 00분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지음·이윤기 옮김/912쪽·1만 원·열린책들

영원히 어느 해변에 앉아 젓지 않고 흔든 마티니를 주문하고 있을 듯했던 배우 숀 코너리가 지난달 별세했다. 미국 주간지 피플은 1989년 ‘살아있는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그를 지목했다. 1985년 멜 깁슨(당시 29세)을 시작으로 지난해 가수 존 레전드까지 31명(리처드 기어,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조니 뎁 2회)이 얻은 타이틀. 59세에 선정된 이는 코너리뿐이다.

코너리가 받은 유일한 아카데미상은 그 무렵 출연한 ‘언터처블’(1987)의 남우조연상이다. 케빈 코스트너의 전성기가 열릴 즈음 만들어진 영화지만 백미는 코너리의 후반부 절명 장면이다.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장미의 이름’(1986)에서는 셜록 홈스를 닮은 기인(奇人) 윌리엄 수사를 연기했다.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출세작을 축약해 각색한 이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서는 개봉 당시부터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윌리엄의 얼굴로 코너리 외에 다른 배우를 떠올리는 건 34년이 흘렀음에도 불가능에 가깝다. ‘섹시’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장한 코너리의 매력에 홀려 책을 펼쳐들었다가 중도에 포기한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도 소설도 메시지는 명료하다. 요새를 닮은 수도원에 모여 사는 수도사들은 일상처럼 저마다 무언가를 애써 불태우고 파묻어 감춘다. 그들이 소각하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의 해석과 다른 방향의 해석이 제기될 가능성이다. 학계와 정관계를 비롯해 현대사회의 모든 크고 작은 조직체에서 날마다 재현되고 있는 모습이다.

불순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이 담긴 서책을 부적격한 범부(凡夫)가 접하지 못하도록 ‘지켜내고 있다’ 자처하는 장서관 수도사 호르헤는 맹인이다. 그가 지켜내려 하는 것은, 눈이 멀기 전 읽은 책을 통해 스스로 세웠다고 믿는 알량한 권위다.

“이 서책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넘게 될 것이다. 넘어서 좋은 경계가 있고 넘어서 아니 될 경계도 있는 법. 그 또한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그에 대한 윌리엄의 일갈은 꾹꾹 참아온 에코의 본심처럼 신랄하다.

“당신은 악마다. 악마는 물질이 아니야. 영혼의 교만, 웃음을 잊은 신념, 의혹의 여지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 악마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서책의 존재 가치는 읽히는 데에 있어. 책은 기호를 전하는 또 다른 기호의 집합체다. 읽히지 못하는 책은, 아무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품은 벙어리에 불과해.”

벙어리 신세가 된 서책은 호르헤의 장서관에 국한된 이야기일까. ‘읽지 마시오’ 푯말이 걸린 대형 카페 장식책장. ‘어려운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겠다’며 해석의 기회를 앗아가는, 그러면서 은근슬쩍 결이 다른 해석을 배척하고 몰아세우는 감언이설. 악마는 물질이 아니기에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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