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60(또는 70)에 능참봉’이란 말이 있습니다. 능참봉은 능(陵) 일을 맡아보던 종9품 미관말직이었으니 늘그막에야 변변치 않은 감투를 쓰게 됐다는 뜻으로 자주 쓰입니다. 하지만 능참봉도 다 같은 능참봉은 아니었죠.
기울어가는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의 삶은 생전은 물론 1919년 1월 21일 승하한 뒤에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비록 열강의 틈에서, 또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다툼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우리는 퇴위한 ‘태황제’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 반면, 일제의 시각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한 직후 황제인 순종을 ‘창덕궁 이왕’, 태황제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한 터였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고종의 장례절차를 축소·변형한 것은 물론 청량리 명성황후 홍릉을 경기 양주군 금곡리로 옮겨 고종과 합장하려는 계획에도 제동을 걸었습니다. 일본에서 능은 천황이나 황후 등에게만 허용된다는 이유였죠. 사후 한 달여 지난 3월 3일에야 고종을 홍릉에 모실 수 있었지만 이번엔 비문이 문제였습니다.
1895년 변을 당한 명성황후의 비문은 훗날 고종과 합장할 것을 감안해 사이사이 공백을 두고 이미 ‘대한/□□□□□홍릉/명성□황후□□’라고 만들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고종태황제’, ‘명성태황후’ 등을 새겨 넣으면 되는데 일제는 아직도 사라진 대한제국 황제 운운하느냐며 ‘대한’과 ‘황제’를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1920년 고종의 시호가 ‘고종태황제’로 확정된 뒤에도 일제는 여전히 비석에는 고종태황제 앞에 ‘전(前)’ 자를 붙이도록 고집을 부려 국장 후 4년이 다 되도록 비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68세의 나이에 홍릉 참봉이 된 고영근이 큰일을 합니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의 청지기로 궁중에 드나들다 고종의 눈에 들어 종2품 벼슬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순종이 홍릉을 참배할 때마다 미완성인 채 비각에 누워있는 비석에 마음 아파하는 걸 지켜보다 더 참지 못하고 1923년 12월 11일 비를 바로세웁니다. 당당하게 ‘대한/고종태황제 홍릉/명성태황후 부좌’라는 비문을 새겨서 말이죠. 부좌(祔左)는 아내를 왼쪽에 합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일제강점기 이왕가와 관련한 일을 맡았던 이왕직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자기네에 소속된 말단 참봉이 아무 보고도 없이 사고를 쳤으니 말입니다. 조선총독부에 물었지만 총독부는 “우리와는 관계없다. 본국(일본) 궁내성과 상의하라”라며 발뺌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왕직은 실세인 일본인 차관이 도쿄로 급히 출장해 일본 황실사무를 담당하는 궁내성 측의 하명을 기다리는 한편 자체회의를 통해 비석을 도로 쓰러뜨리라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고 참봉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못하겠다고 버텼죠.
동아일보는 12월 13일자 3면에 ‘고종태황제의 능비 건립’ 이하 10개의 기사로 전후 사정을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이어 ‘대한 고종태황제’ 비를 보려고 인파가 몰려들자 이왕직에서 비석에 붉은 천을 씌웠다는 폭로기사, 전주이씨 문중 모임인 이화학회가 결의문을 채택하고 순종에 상소를 올리고 일본 궁내대신에게 건의서를 보내 홍릉 고종비를 인정하라고 했다는 기사 등을 게재하며 여론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일제도 비석을 훼손할 경우 민심이 극도로 악화될 것을 우려해 추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영근은 1923년 3월 파면됐고, 이후 극도로 쇠약해져 그 해 4월 1일 천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고영근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황국협회 부회장,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냈고 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인 우범선을 일본에서 처단하기도 하며 많은 족적을 남겼지만 오늘날 우리에겐 ‘조선 최강의 능참봉’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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